소비자물가 상승률이 1%선 마저 위협받으면서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내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더 커지고 있다. 이런 물가 수준은 한은의 중기물가목표(2.5~3.5%)의 하단에 크게 못 미치는 것으로 1%대 이하 저물가 국면이 벌써 2년 가까이 돼간다. 여기에는 석유류와 농산물가격이 계속 하락한 공급 측면의 요인도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이를 제외한 물가(근원물가) 상승률도 1%대로 둔화하는 등 경기 부진에 ‘상품과 서비스를 사려는 사람(수요)'이 적어 저물가가 심화된 모습이다.

전문가들은 현 물가 상황을 교과서적인 의미의 디플레이션(물가하락과 경기침체가 동반되는 현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런 조짐이 보이는 만큼 적극적인 통화정책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분위기다. 한은이 기준금리를 추가로 내려 경기활성화를 뒷받침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엔화 약세에 대한 방어 측면에서도 금리를 내려야 한다는 의견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이미 시장에서도 추가 금리 인하에 대한 기대가 반영되고 있다. 국고채 3년물은 기준금리(2.25%) 아래로 하락,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1일 국고채 3년물 수익률은 전일 대비 7.8bp 급락한 2.219%로 마감했다.

◆ 수요 부진 심각…근원물가 상승률, 7개월만에 1%대로 하락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달 소비자물가지수는 전년동월대비 1.1% 상승에 그쳤다. 올 2월(1.0%) 이후 7개월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다. 변동성이 심한 농산물과 석유류를 제외한 근원물가지수 상승률도 전년동월대비 1.9%에 머물러 7개월만에 1%대로 둔화, 수요 부진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지난달 금융통화위원회 직후 가진 브리핑에서 "수요 측면에서의 물가 상승압력을 나타내는 게 근원 물가이기 때문에 동향을 상당히 중요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정규철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근원물가 상승률 둔화 정도를 보면 분명 수요 부진이 목격된다"며 "기상호조, 국제유가 하락과 같은 공급 쪽 요인을 감안하더라도 현 물가 수준은 많이 낮다"고 말했다. 임희정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경기가 안좋다보니 기업은 비용이 올라도 매출 하락을 우려해 물건 가격을 올리지 않고, 가계는 소득이 받쳐주지 않다 보니 지갑을 열지 않아 저물가 지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 전문가들 "한은, 추가 금리 인하 고려해야…부작용보다 경기 우려 달래는 게 먼저"

저물가-저성장이 지속되는 현 시점에서는 한은이 기준금리를 추가로 내려서 경기를 부양하려는 의지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게 바람직하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늘어나고 있다. 이날 국고채 3년물은 10월 금통위에서 기준금리가 인하될 것이란 전망이 높아지며 기준금리(2.25%) 아래로 떨어졌다.

강중구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한은이 기준금리를 추가로 인하해 방향성을 확실히 보여줘야 한다"며 "방향성이 명확하지 않다 보니 시장금리가 기준금리를 낮추기 전에는 미리 떨어지다가, 기준금리가 인하되고 나서 부터는 다시 오르는 모습을 보여 인하 효과가 반감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규철 KDI 연구위원은 "한은이 물가와 경제 회복세를 모두 고려한다면 금리를 내리는 게 맞다"고 말했다.

기준금리를 추가로 내리면 엔저에 대한 방어 효과가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금리를 내리면 원화 가치가 떨어져서 원·엔 환율 하락을 막을 수 있고, 원·달러 환율은 상승해 엔화 값 하락을 상쇄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다만 가계부채 문제와 미국의 양적완화 종료 등을 감안하면 경제지표의 개선 추이를 살펴보고 나서 대응하는 게 맞는다는 의견도 있다. 임희정 연구위원은 "금리 결정에서 물가가 중요한 요소지만 지금까지 다른 경제지표가 예상보다 크게 악화된 것은 아니어서 신중해야 한다"며 "지금 상황이 금리를 더 인하한다고 해서 엄청난 시너지 효과가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 현실과 동떨어진 한은 물가안정목표 다시 ‘도마’

저물가가 장기화되며 유명무실해진 한은의 중기물가안정목표(2.5~3.5%)도 도마에 오르고 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지난달까지 23개월 연속 1%대 이하를 지속하며 이 목표의 하단에도 못 미치고 있다. 정규철 연구위원은 "한은이 2.5~3.5%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우리 경제 수준에 맞다고 해서 정했다면 더 적극적으로 통화정책을 펼쳐서 물가를 올릴 생각을 해야 하는데 그런 의지를 보이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지난달 금통위에서는 한은이 공식적으로 해명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금통위 의사록에 따르면 한 금통위원은 "원화 환율, 원자재 가격 여건 상 내년까지 소비자 물가 상승률이 2.5%를 밑돌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같이 3년 동안 소비자물가가 목표를 벗어난 데 대해 (한은은) 대외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현행 물가안정목표제 기한은 2015년까지다. 우리 경제가 선진국화 되어가는 추세여서 목표 수준을 낮춰야 한다는 의견은 힘을 얻고 있다. 임희정 연구위원은 "우리나라의 경제성장률을 고려하면 물가가 3~4%대로 가기는 어렵다"며 "목표치를 낮추게 된다면 정책 공조에도 보다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