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P와 델이 만드는 고(高)성능 서버용 컴퓨터에는 삼성전자의 '3D V낸드 플래시 메모리(이하 V낸드)' 반도체가 저장 장치로 들어간다. V낸드는 플래시메모리 중에서는 가장 첨단의 제품이다. 기존 제품보다 데이터 처리 속도가 2배 빠르지만 전력 소비량은 40%에 불과하다. 현재 지구상에서 V낸드를 생산하는 회사는 삼성전자가 유일하다. 삼성이 V낸드를 생산하는 곳은 어디일까. 주 생산지가 경기도 기흥(器興)이 아니라 중국의 시안(西安) 공장이다.

9월 초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유럽 최대 가전 전시회 'IFA 2014'. 여기서 가장 인기를 끈 제품 가운데 하나가 LG전자가 전시한 '105인치 곡면(曲面) 초고화질(UHD) TV'였다. 이 TV에는 LG디스플레이가 경기 파주 공장에서 생산한 105인치 LCD 패널(화면을 구성하는 핵심 부품)이 들어갔다. 역시 최첨단 제품이다. LG디스플레이는 이와 똑같은 제품을 이달부터 중국 광저우(廣州) 공장에서도 생산하는 중이다.

한국의 첨단 제조 라인 중국으로

반도체·디스플레이·전기차 배터리 등 차세대 첨단 산업의 제조 역량이 중국으로 급속히 빨려 들어가고 있다.

삼성·LG·SK 등 국내 주요 그룹들은 과거 고가(高價)의 첨단 제품은 한국에서 생산하고 중국은 한두 세대 뒤진 제품의 생산 기지로 활용했다. 최근엔 이런 공식이 완전히 무너졌다. 최첨단 제조 설비를 한국보다 중국에 먼저 설치하는 사례마저 속출한다.

삼성·SK·LG그룹이 차세대 먹거리로 선정해 중점 육성하는 전기차 배터리 공장이 대표적인 예다. 한국에는 전기차 배터리만 대량으로 생산하는 전용 공장은 없다. 그런데 삼성SDI는 지난 8월 중국 시안에서 전기차 배터리 전용 공장 기공식을 가졌다. SK이노베이션도 올해 안에 전기차 1만대에 공급할 수 있는 배터리 제조 라인을 중국에 만들 계획이다.

기업들은 "거대한 중국 시장 변화에 빠르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현지 생산 체제 구축이 불가피하다"고 설명한다. 중국은 이미 자동차와 스마트폰, TV 등 주요 품목에서 모두 세계 1위 시장이다. 이 시장을 도외시할 수 없으니 부품·완제품 구분 없이 첨단 설비가 급속하게 중국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제조·공정 기술도 넘어가

문제는 이런 과정에서 한국 제조업의 강점인 제조·공정 기술이 중국으로 고스란히 넘어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서강대 정옥현 서강미래기술연구원장은 "한국 제조업의 경쟁력은 원천 기술보다는 뛰어난 제조 기술과 생산 기술"이라며 "첨단 공장이 중국으로 가면서 우리의 강점이 그대로 중국으로 넘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은 첨단 산업에서도 우리를 턱밑까지 추격해왔다. 이미 '중국 부메랑'의 공격으로 신음하는 기업들이 적지 않다.

경기도 안산 반월공단에 있는 서울반도체 공장 입구엔 최근 '한국에서 유일한 LED 생산기지를 사수하자'는 현수막이 내걸려 있었다. 빛을 내는 반도체인 LED는 TV·스마트폰 등에 쓰이는 주요 부품이다. 국내 LED 산업 기반은 중국의 역풍에 초토화 지경이다. 과거 주요 업체의 LED 공장은 모두 한국에 있었지만 2010년 삼성전자가 중국 톈진(天津)에 LED 공장을 가동했고, LG이노텍도 2011년 중국 후이저우(惠州)에서 LED를 양산하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생산한 저가 LED 제품이 한국으로 역수입되면서 국내에 생산 기반을 둔 서울반도체 같은 회사를 위기로 몰고 있다. 서울반도체는 올 2분기 실적이 급락하면서 주가가 52주 최저치로 떨어지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다.

9월 초 독일에서 열린 IFA 전시회에서 중국의 TV회사 TCL이 세계 최초로 '110인치 곡면 UHD TV'를 내놓은 것도 비슷한 경우다. 화면 크기, 곡면 기술, 화질 등 세 가지 측면에서 최고난도 제품을 한국보다 중국 업체가 먼저 내놓은 것이다. 여기에는 자국 업체 BOE가 만든 LCD 패널이 들어 있다. BOE는 2002년 하이닉스반도체(현 SK하이닉스)의 LCD사업부를 인수해 LCD사업에 뛰어든 업체다. 중국의 대형 LCD사업 시초가 바로 하이닉스로부터 시작됐다. 그렇게 중국에 넘어간 한국 LCD 기술이 이젠 한국 LCD 산업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