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오후 부산시 감천항 부두. 지게차 4대가 톈진(天津)항에서 온 2척의 배에서 중국산 철강(鐵鋼) 제품들을 하역하고 있었다. 축구장 5배가 넘는 크기의 야적장(野積場)에는 사람 키 3배 정도 높이로 철강 제품들이 쌓여 있었다.

이 부두에 쌓여 있는 선박용 후판(厚板)과 건설용 H형강 제품은 9만5000t 분량으로 국내 중급 규모 제철소의 한 달 생산량이다. 3시간 동안 야적장의 철강제품을 실은 25t 트럭 30대는 창원·울산의 조선소와 전국 건설 현장으로 떠났다. A철강 유통사의 최모 차장은 "야적장에 있는 철강 제품은 100% 중국산"이라며 "국내 중소 유통 상인들이 2~3년 전부터 대대적으로 중국 철강을 수입해오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 특수(特需)로 10년간 '황금 성장'을 구가해 오던 한국 철강산업이 국내로 역(逆)수출되는 중국산 공세에 뿌리째 흔들거리고 있다. 휘발유 같은 석유 완제품과 석유화학·조선 등 한국의 간판 굴뚝산업이 중국 부메랑에 직격탄을 맞고 있다.

◇한국 철강업계 뒤흔드는 중국産

동부제철이 1조3000억원을 들여 2009년 준공한 충남 당진 열연 공장은 가동 중단 직전 상태다. 공장을 돌리면 돌릴수록 손해가 나기 때문이다. 한국철강협회 관계자는 "국내로 들어오는 중국산 열연 강판이 당진 공장 제품보다 t당 5만~6만원 정도 싸기 때문에 아예 경쟁이 안 된다"고 말했다.

중국산 철강 제품이 물밀듯 한국 시장에 들어오면서 한국 철강산업이 위기에 처했다. 사진은 이달 초 부산 서구 감천항에 중국산 철제품이 가득 쌓여 잇는 모습. /부산=김종호 기자<br>이미지를 클릭하시면 그래픽 뉴스로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주범(主犯)은 중국발(發) 철강 공급 과잉이다. 2003년 2억2000만t이던 중국 철강 생산량이 지난해 7억7900만t으로 10년 만에 4배 늘었다. 이는 한국의 연간 총생산량(6610만t)보다 10배 이상 많다. 중국의 수출 둔화 등으로 남아도는 철강 물량이 한국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다. 올해 상반기 중국산 철강 제품 수입량(670만t)은 작년 동기 대비 34% 정도 늘었다.

문제는 양국 철강 제품의 품질 격차가 거의 없고 일부는 한국산을 능가한다는 점이다. 한 철강업계 관계자는 "초고압가스 이송관용으로 쓰이는 이음매 없는 특수 강관(鋼管)의 경우 중국산이 세계시장의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며 "중국이 서부의 천연가스를 상하이 등 동부 도시로 수송하는 대규모 국책 사업을 시행하면서 특수 강관 분야에서 비약적인 기술 발전을 이뤄냈다"고 말했다.

한국 대표 정유·조선 기업도 '휘청'

2011년까지 승승장구하던 한국 정유사들은 요즘 시장 가격보다 최고 15% 정도 낮은 가격에 휘발유 등 정제(精製) 제품을 싱가포르 현물 시장에 팔고 있다. 이는 중국이 최근 완공한 정유 공장에서 만든 제품을 한국산보다 훨씬 저가(低價)로 동남아 시장에 쏟아내기 때문이다. 그 여파로 국내 1위인 SK이노베이션은 올 2분기 16조원의 매출을 올렸는데도 500억원 영업 적자를 냈다. 한 정유업체 임원은 "가장 안정적으로 수익을 내던 정유업체들의 적자 행진에 엄청난 충격을 받고 있다"며 "정유 정제 산업은 이제 미래가 없다는 생각마저 든다"고 말했다.

조선업계에서도 중국 기업들은 2012년부터 3년 연속으로 선박 수주량과 건조량, 수주 잔량 등 3대 지표에서 한국을 제치고 1위이다. 해양 플랜트 부문에서 지난해 한국 기업들의 총수주액은 188억달러이지만 중국은 245억달러에 달했다.

업계 관계자는 "중국과 경쟁하느라 우리 기업들의 수익성이 갈수록 악화하고 있다"며 "설계 등 핵심 기술 없이 중국과의 가격 경쟁은 정말 버겁다"고 말했다. 현대중공업이 올 2분기 1조1037억원의 사상 최대 영업 적자를 낸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전문가들은 "연구·개발(R&D) 소홀과 단기 실적주의가 이런 현상을 초래했다"고 진단한다. 한 석유화학업체 사장은 "중국 석유화학·철강산업이 급속 발전할 것이란 예상이 10년 전부터 나왔지만 중국 내 수요가 공급보다 많다는 신화(神話)에 빠진 데다 단기 실적 호황에 빠져 본격 대응을 못 했다"고 말했다.

김희집 서울대 행정대학원 초빙교수는 "철강·석유·화학 등 원천기술 없이 대규모 설비투자를 통해 돈을 벌던 시대는 막을 내렸다"며 "완전히 새롭게 출발한다는 각오로 산업을 재편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