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삼성동 한전부지(8만㎡ 규모)에 10조5500억원을 쏜 현대자동차그룹의 베팅에 재계가 충격을 받았다. 남의 회사의 결정에 가타부타하기 꺼리는 보수적인 재계에서도 "패닉(panic·충격 또는 혼란)에 빠졌다"라는 반응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재계에서는 사옥 부지 마련이 절실한 현대차 사정상 과감한 베팅이 불가피했을 것으로 보지만, 감정가(3조3000억원)의 3배가 넘는 10조5500억원을 토지 매입 비용으로 쏟아붙는 것은 지나친 모험이라는 반응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현대자동차 그룹이 '승자의 저주'에 빠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다른 한편에선 이번 입찰에 참여한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현대모비스(012330)의 현금보유액과 현금창출능력 등을 감안하면 터무니 없는 베팅이 아니라는 시각도 내놓고 있다.

◆ "땅값에 10조이상 투자?"···패닉 빠진 재계

한국전력이 18일 삼성동 본사 사옥 부지 매입자로 현대자동차 그룹을 발표하자 재계는 일순간 술렁였다. 현대자동차그룹이 써낸 입찰가격이 한전이 제시한 예상입찰가(3조4000억원)의 3배 가량인 10조5500억원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이는 현대차그룹이 현금화 할수 있는 자산(현금 및 현금성 자산, 단기금융상품) 25조5000억원의 40%에 해당하는 엄청난 규모다.

재계에서는 수익성이 불확실한 부동산 개발 투자에 10조원 이상을 투자하겠다는 계획에 우려가 많았다. 현대차는 한전 부지에 초고층 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를 짓고 자동차테마파크와 컨벤션센터 등을 조성해 연 10만명이 방문하는 랜드마크로 조성하겠다는 계획이다. 이 과정에서 토지 매입가 외 5조~10조원 가량의 개발비용이 소요될 것으로 관측된다. 삼성동 한전부지를 개발하는 데 총 20조원 가량 소요될 수 있다는 계산이다.

A 대기업 관계자는 "부동산 투자 수익률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감정가의 3배가 넘는 돈을 땅에 투자해서 어떻게 수익을 회수하겠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B 대기업 관계자는 "10조원을 공장 건설이나 신사업 추진 등에 사용한다면 내수활성화와 고용창출에 엄청한 효과를 냈을 것"이라며 "투자로 인한 경제파급이 크지 않은 부동산 매입에 10조원이나 쓴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C대기업 관계자는 "현금 보유 능력이 뛰어난 현대차그룹이라도 해도 10조원을 부동산 매입에 사용하게 되면 재무적부담이 만만찮게 가중될 것"이라며 "토지매입비용과 개발비용을 어떻게 조달할 것인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벌써부터 막대한 한전부지 개발 비용 때문에 현대차가 자동차 판매가격을 인상하거나, 납품업체 대한 부품가격 인하 등으로 전가시킬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D대기업 관계자는 "지난 몇년간 성장일변도였던 현대차가 최근들어 수익성이 조금씩 나빠지는 상황에서 한전 부지 매입에 10조원 이상씩 쓰게되면 재무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다"면서 이같이 전망했다.

◆ "현대차 경영 신뢰도에 부정적 영향" 예상

재계에선 이번 입찰이 현대자동차 그룹 평판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일각에서 우려하는 것 중 하나로 현대자동차의 의사결정 능력에 대한 신뢰가 떨어질 수 있다는 전망이 있다. 삼성측은 입찰가격을 함구하고 있지만, 3조4000억원의 유효입찰 가격보다 50% 정도 많은 5조1000억~5조2000억원 가량 써냈을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이에 비해 현대차가 써낸 10조5500억원은 유효입찰 가격의 310%에 이른다.

한 IB업계 전문가는 "통상적으로 베팅을 과하게 한다고 해도 유효입찰가격의 100% 이상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면서 "상대방 입찰가의 2배 이상, 유효입찰가격의 3배 이상 써냈다는 것은 삼성측의 정확한 입찰 정보가 없었거나 입찰 전략이 부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현대자동차가 현재 처한 상황에서 10조원 이상을 부동산에 투입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의구심도 있다. 최근의 일본의 엔저 공세, 노노(勞勞) 분쟁으로 인한 노사분쟁의 장기화 가능성, 해외 생산기지의 정상화 지연 등으로 현대자동차의 수익 악화에 대한 우려가 많은 상황에서 대규모 부동산 개발에 나서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이냐는 지적이다.

이같은 우려가 반영된 탓인지, 한전 부지 입찰 결과 발표 이후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 현대모비스 주가는 일제히 7~9% 하락했다. 한 증권가 전문가는 "현대차가 한전부지 입찰에 10조원 이상을 쓴다는 소식이 전해진 이후 외국인들이 일제히 현대차 그룹 주식을 매도했다"면서 "전반적으로 그룹 경영에 대해 신뢰하지 못하겠다는 판단이 우세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와 달리 삼성측은 이번 입찰 실패가 오히려 약(藥)이 되는 분위기다. 이건희 회장이 장기 입원 중인 상황에서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성과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무리하게 베팅할 가능성이 있었는데, 평정심을 유지했다는 얘기다. 한 재계 관계자는 "현대차가 근소한 우위로 입찰에 성공했다면 이 부회장의 리더십에 부담을 줬을 것"이라며 "현대자동차가 예상을 뛰어넘는 높은 가격을 써내는 바람에 삼성의 신중함이 돋보이는 반사효과가 발생했다"고 말했다.

◆ "'승자의 저주' 가능성 적은편···국민 후생에 도움될 수도"

다른 한편으로 현대자동차그룹의 현금보유 능력 등을 감안하면 무리한 투자는 아니었다는 시각도 있다. 이번 한전부지 입찰에 참여한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 현대모비스 3사의 현금성 자산규모(현금 및 현금성 자산, 단기금융상품)는 29조4800억원 가량이다. 이들 3사의 현금성 자산은 2012년말 19조8000억원 수준이었지만 지난 2년여동안 10조원 가량 증가했다.

기업 재무상황에 정통한 한 전문가는 "올 상반기 현대차 그룹의 영업으로 인한 현금(창출)흐름이 4조원을 넘었고 기존의 탄탄한 현금보유 능력 등을 감안할 때 10조원 정도 자금동원으로 재무구조가 갑자기 나빠질 것이라고 볼 이유는 없다"면서 "최근 2년간 영업이익이 급증한 과정에서 대기업의 과도한 현금 보유로 인한 사회적 논란이 컸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현대차가 '통 큰 투자'를 했다고 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일각에서는 이번 한전 부지 매입가격이 한전의 부채비율 감축으로 이어져 국가 전체로 보면 나쁠 것 없다는 시각도 있다. 백승정 한전 기획본부장(전무)은 이날 본사 매각입찰 발표 후 "본사 부지 매각대금이 예상보다 커지면서 부채감축 계획에 긍정적"이라면서 "향후 정부와 협의를 거쳐 구체적인 부채감축 계획을 세울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번 매각 대금이 들어오면 지난 6월말 기준 207%인 한전의 부채비율이 한꺼번에 180%대로 낮아지는 효과가 있다. 한 재계 관계자는 "현대가 한전 부지에 통큰 투자를 한 결과 한전의 부채비율이 낮아지면서 전기값 인상을 최소 1번 이상 안해도 될 요인이 발생했다"면서 "외국에 무리한 투자를 하면 국부를 유출시키는 것이지만 국내투자로 인해 국민들의 후생이 늘어나는 측면이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