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과의 대화 책 표지

20시간에 걸친 잠복 취재 끝에 빛이 보이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20일 오후 3시, 5톤 크기의 빨간 폐지 수거 트럭이 이슬비를 맞으며 인쇄소 정문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인쇄소 맞은편에서 폐지 수집 과정을 숨죽이며 지켜봤다. 40분쯤 지났을까. 짐칸에 폐지를 가득 실은 트럭이 텅 빈 인쇄소 마당을 뒤로하고 정문을 빠져나왔다.

트럭에 실린 여러 자루 중 분명 어딘가에 책 내용이 담긴 폐지들이 섞여 있을 터. 트럭을 쫓았다. 경기 파주를 출발, 수색역 주위를 돌던 트럭은 고양시 용두동에 위치한 한 폐지수거장에 멈춰 섰다.

트럭에서 내리는 운전기사를 붙들고 폐지 자루를 확인해 보고 싶다 부탁했다. '별사람 다 보겠네'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 사이로 "마음대로 하시라"는 대답이 나왔다. 일일이 부댓자루를 열어 폐지에 적혀 있는 내용을 눈으로 훑기 시작했다. 폐지수거장은 최근 계속된 궂은 날씨에 이미 진흙밭이 돼 있던 상황. 비를 맞아가며 1시간을 뒤졌다. 원하는 내용이 나오지 않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운전기사에게 달려가 남은 자루가 없느냐고 물었다. 그제야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자루 한 개가 남았다며 트럭 뒤를 가리켰다. 72시간의 기다림 끝에 김우중 회고록 '김우중과의 대화-아직도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의 내용이 담긴 폐지 뭉텅이를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김우중 대화록 내용이 담긴 폐지로 가득한 자루 모습이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회고록 입수 과정은 첩보영화를 방불케 했다. 일명 뻗치기라 불리는 밤샘 잠복취재는 물론, 비를 맞아가며 폐지수거장을 뒤져야 했다. 찾아가는 사무실마다 귀찮은 불청객이 왔다는 듯, 면박을 주기도 했다. 조선비즈는 72시간을 매달린 끝에 책 대부분을 복원할 수 있었다.

대우그룹 해체 과정에 대한 김우중 전 회장의 입장이 처음으로 공개되는 만큼, 세간의 이목이 이 책 한권에 쏠려 있다. 저자 측은 책이 공개됐을 때 경제계는 물론, 정치권에 미칠 파장을 고려해 책과 관련한 모든 내용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심지어 출판사도 공개하지 않았다. 조선비즈는 하루라도 빨리 독자에게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책을 입수키로 하고 취재에 들어갔다.

책 '김우중과의 대화'의 내용이 담긴 폐지를 수거하는 모습이다.

입수 작전은 저자 측에서 책 내용의 일부를 공개한 지난 18일부터 시작됐다. 책 유통과정을 알기 위해 출판사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서점조합연합회에 전화해 검색만으로 출간예정도서의 출판사 정보를 알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에서 검색한 결과 출판사는 B사였다. '대우학술총서'와 '대우고전총서'를 출간한 업체다. 사무실 위치는 서울 남대문로 대우재단빌딩.

B사를 찾아가 먼저 책을 구매하겠다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오히려 출판사는 영업방해라며 으름장을 놓기까지 했다. 세 차례나 찾아갔지만 결국 책은 구할 수 없었다. 대신 B출판사와 거래하는 인쇄업체 7곳이 적힌 명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책을 확보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단서를 마련한 셈이다.

인쇄업체 7곳을 차례로 돌았다. 서울 충무로에서 경기 파주까지 120㎞ 가 넘는 거리를 다녔다. 물어보는 인쇄소마다 우리가 아니라며 손사래 쳤다. 단서는 우연한 곳에서 나왔다. 파주 출판단지 내 위치한 C인쇄소에서 버린 폐지에 '대통령', '대우 해체' 등의 단어가 박혀 있었다. 담당자를 만나 폐지를 사고 싶다고 요청했다. 하지만 인쇄소 담당자는 난색을 표했다. 결국 폐지 수거 차량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김우중과의 대화 책 모습

조선비즈는 지난 19일 밤부터 인쇄소 근처에서 잠복 취재를 시작했다. 종일 차 안에 갇혀 폐지 수거 차량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끼니는 물과 초콜릿으로 대신했다. 생각보다 대기 시간이 길어지면서 몰래 잠입해 폐지를 들고 나올까 하는 유혹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취재 윤리와 법을 어기면서까지 책을 구할 수는 없는 일. 오랜 시간을 기다린 끝에 20일 오후 5시 무렵 폐지수거장에서 책 내용을 인쇄한 폐지를 넘겨받아 취재 차량 트렁크에 옮겼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폐지를 분류하는 데에는 5시간이 넘게 걸렸다. 10여명이 100㎏이 넘는 양의 폐지를 밤늦게까지 쪽수별로 맞춰 보며 일일이 확인했다. 일부는 비에 젖어 찢어지지 않도록 드라이기로 말렸다. 찢어진 부분은 테이프로 붙여 가며 끼워 맞췄다. 책의 20페이지 정도는 폐지를 찾을 수 없어 복원하지 못했다. 책은 저자인 신장섭 싱가포르대 교수와 김우중 전 회장이 대화하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책 분량은 표지로부터 시작해 총 448페이지에 이른다.

책 '김우중과의 대화'의 폐지를 복원한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