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리만자로는 눈 덮인 산으로 높이가 해발 1만9710피트(공식 기록은 5895미터)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일컬어진다. 서쪽 정상은 마사이어로 ‘응가예 응가이’라 불리는데 ‘신의 집’이라는 뜻이다.”

헤밍웨이의 단편소설 ‘킬리만자로의 눈’은 이렇게 시작된다. 아마도 사람들에게 더 많이 알려진 것은 그 다음 구절일 것이다.

“서쪽 정상 가까이에 말라 얼어붙은 표범의 시체가 하나 있다. 그 표범이 그 높은 곳에서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는 지금까지 아무도 설명하지 못했다.”

조용필이 불러 유명해진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도 여기서 유래했다. 가사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 다니는 산 기슭의 하이에나가 되기보다 산정 높이 올라가 얼어서 죽는 눈덮인 킬리만자로의 그 표범이고 싶다.”

하지만 내가 킬리만자로로 향한 것은 표범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미국 자포스(Zappos)의 젊은 창업자 토니 셰이의 자서전이 계기라면 계기였다. 지난해 여름 우연히 그의 자전 ‘행복 배달하기(Delivering Happiness’)를 읽던 중이었다. 거기에 소개된 그의 킬리만자로 등반기가 호기심을 자극했다.

“킬리만자로 산행은 내가 가진 의지력의 마지막 1온스까지 시험하는 것 같았다.” 그는 킬리만자로 정상까지 가는 닷새 동안의 등반 기간 절반을, 흘러내리는 콧물과 코피 때문에 티슈를 코에 꽂고 다녀야 했다고 했다. 천신만고 끝에 정상을 정복했을 때는 “지옥에 갔다가 돌아온 기분”이었다고 썼다.

‘지옥에 다녀온 기분이라…’

호기심과 더불어 도전욕이 불처럼 일었다. 거기에 기름을 더한 것은 작년 겨울. 캐나다로 오로라 여행을 갔다가 만난 일행 중 한 명이 킬리만자로를 갔다온 얘기를 하는 것 아닌가. 50대 여성인 그는, 주저하는 내게 “나 같은 사람도 갔다왔는데 뭘 그러느냐. 문제없다”며 부추겼다.

그래, 올 여름은 킬리만자로다. 그 길로 마음을 굳혔다. 연초에 국내 여행 상품을 찾아내 예약을 했고, 마침내 그날을 맞았다.

20시간이 걸려서 날아간 킬리만자로 공항

7월 30일 저녁, 인천공항으로 가는 리무진 버스 안. 나는 초조했다. 이미 30분 정도 약속 시간에 늦은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전화벨이 울렸다. 여행사 가이드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미안하다는 말부터 했다. 다행히 저쪽에서 “걱정 말고 오시라”고 한다. 알고 보니 우리가 탈 비행기가 지각이었다. 1시간 이상 연착이 예고됐다.

여유있게 출국 수속을 끝낸 것도 잠시. 이번엔 출발 시간이 엿가락처럼 늘어졌다. 밤 12시를 훌쩍 넘기고 30분이 돼서야 비행기는 이륙했다.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홍콩을 경유,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를 거쳐 20시간이 넘는 비행 끝에 도착한 공항의 이름도 킬리만자로였다. 시골 역 같은 조촐한 규모에 등산객들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북적댔다. 비자 발급(50불)과 입국 수속을 끝내고 공항 밖을 나오니 밖의 날씨는 쾌청했다.

적도 부근인데도 걱정했던 만큼 덥지도 않았다. 해질녘이기도 했지만, 이곳 아루샤만 해도 해발 고도 1350미터에 달하는 고원인데다 습도가 낮았다. 시계(視界)도 좋아 멀리 설산도 눈에 들어왔다.

“와우, 저게 킬리만자로야. 원래 대단히 낯을 가리는데(very shy·구름에 가려 안 보이는 날이 많다는 뜻), 오늘 굉장히 운이 좋은 거다.” 운전사가 신이 나서 떠들었다.

아프리카 스와힐리어로 ‘빛나는 산’, 킬리만자로. 1년 내내 눈이 오지 않는 적도 지역에 자리잡고 있으면서도, 5895미터 정상 우후루(자유) 봉만은 예외다. 멀리서도 만년설이 한쪽을 뒤덮고 있다. 지구온난화 때문에 2020년이면 그마저 사라질 거라는 말도 들린다.

그곳까지 앞으로 5박 6일에 걸쳐 오르게 된다. 하루에 1000미터씩 고도를 높여가는 셈이다. “내일 아침엔 8시 기상…” 가이드의 설명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먼 산을 넋놓고 보다가, 문득 ‘저길 내가 올라간단 말이야?’ 마음 속 한 구석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흙먼지 폴폴 나는 길가로 소와 염소떼를 몰고 가는 아낙과 소년들이 이따금씩 눈에 띄었다. 붉은 망또가 구릿빛 피부와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 마사이족들이다. 저마다 한 손에 긴 막대기를 든 채, 다른 손으로는 휴대전화를 들고 통화를 하는 모습이 묘했다.

◆ 첫번째 산장이2720미터, 백두산높이 육박

시내 호텔에 여장을 푼 다음 날 아침, 킬리만자로 산행 출발점인 마랑구 게이트(해발 1970미터)로 향했다. 이곳에서 현지 가이드와 포터(짐꾼)들을 만났다. 우리 일행 16명을 이끌고, 짐을 지고, 음식까지 해 대면서 갈 지원부대다. 포터는 등산객 1인당 2명, 가이드는 2인당 1명, 요리사는 2명 등 대부대였다.

낮 1시 30분 드디어 출발. 진입 게이트를 지나 열대우림 속으로 난 길을 걷고 또 걸었다. 앞장 선 현지 가이드는 ‘폴레폴레’를 반복해서 말했다. 여기 말로 ‘천천히’라는 뜻. 가는 중간에도 주문처럼 반복했다. 처음엔 한발한발 소걸음 같은 더딘 보속(步速)이 조금은 답답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원칙의 소중함을 나중에 절실히 깨닫게 된다.

4시간쯤 걸었을까, 첫 숙소인 만다라 산장이 나타났다. 벌써 해발 2720미터다. 백두산 높이(2744미터)에 육박한다. 숙소는 목재로 만든 전형적인 방갈로였다. 16명이 한 방에서 2층 침대에 나누어 잤다.

가는 산장마다 기본 구도는 비슷했다. A자형 방갈로가 여러 동 서 있었다. 방갈로는 예약 손님들 차지이고 주변 야영지에 등산객들의 텐트가 들어차곤 했다. 방갈로는 4인용부터 16인용까지 다양했다. 침상은 성인이 누우면 꼭 맞을 정도의 크기였다.

매일 아침이면 포터들이 더운 물을 숙소 앞까지 가져다 줬다. 1인당 두 바가지 정도 분량의 물을 할당받아 세수를 했다. 대개 눈코입을 씻을 정도다. 그밖의 것들은 준비해 간 물티슈로 해결했다. 머리감기나 샤워는 언감생심. 물도 시설도 없지만 자칫 감기라도 걸리면 끝장이기 때문에 피하는 게 상책이다. 화장실은 재래식에 수세식도 같이 있는데 그런 대로 참고 쓸 만했다.

매일 아침 수통 2개에 물을 받아, 길을 가는 동안 수시로 마셨다. 각자 짊어진 배낭 외에 별도의 카고백은 포터들이 날랐다. 전속 요리사는 식사를 책임졌다. 매 끼니마다 스프와 빵, 고기 스튜, 감자, 소시지, 야채 같은 것들이 번갈아가며 나왔다. 그 외에도 일행들 각자가 챙겨 온 고추장이며 김, 장아찌 따위를 꺼내 나눠 먹곤 했다.

◆ 볼일 보러 나섰다가 마주한 별의 바다

다음날 6시에 일어나 식사를 한 후 8시 20분에 출발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풀과 나무의 키가 작아졌다. 관목 숲길을 걷다가 정오가 조금 지나 점심으로 도시락을 먹었다. 잼과 버터를 얇게 바른 샌드위치와 닭다리구이, 몽키바나나, 망고 주스 등이 들어있었다. 맛이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 앞에는 가야 할 길이 멀었고, 거기까지 가려면 에너지가 필요했다. 가리지 않고 먹었다.

다시 출발해서 가는데 갑자기 안개구름이 사방에서 몰려들면서 기온이 급강했다. 자켓을 꺼내 입었다. 해발 3500미터 지점쯤 되니 손발 끝이 절여오기 시작했다. 고산병 증세의 첫 신호였다. 고산증은 대개 두통, 구토, 설사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사람마다 양상이나 정도가 다르다. 수통의 물을 연거푸 들이켰다.

낮 2시 50분쯤 두번째 숙소인 호롬보 산장에 도착했다. 해발 3720미터. 사방이 안개로 자욱했다. 습도계가 40% 이상을 기록했다. 뜨거운 물에 차를 타서 거푸 마셨다. 방을 배정 받은 후 침낭 속에 파고들자마자 까무라치듯 잠이 들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 1시 55분. 볼일을 보러 밖으로 나섰다가 머리 위로 하늘의 별바다와 마주쳤다. 초롱초롱, 마치 하늘에서 별들이 그렇게 소리라도 내는 것 같았다. 책에서 본 별자리들이 눈앞에 보란듯 자리를 잡고서 빛을 뿜고 있다. 희뿌연 은하수인가 싶은 것도 뚜렷이 윤곽이 보였다. 어느새 한쪽에서는 유성이 핑- 하고 보였다 사라졌다. 한참을 보고 있으니 여기저기서 명멸했다. 모두 세 차례나 볼 수 있었다. 킬리만자로 정상 정복의 징조라고 내맘대로 해석했다. 그러고 나니 두통도 잠시 가시는 듯했다.

아침에 일어나니 멀리 하얀 눈모자를 쓴 킬리만자로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마치 아래로 눈을 내리깔고 ‘너희들 거기서 뭐하고 있느냐’ 묻는 듯한 포즈였다. 보기에도 늠름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곳에서 하룻밤을 더 묵기로 돼있었다. 고지 적응을 위해서다. 인근 470미터 높이 지점에 있는 얼룩말 바위(지브라락)까지 올라갔다오는 것으로 현지 적응 훈련을 했다. 목표 지점인 바위만 해도 멀리서는 아무것도 아닌가 싶었지만 막상 가까이 가서 보니 7-8층 건물 높이였다. 암벽에 난 줄무늬 검정 얼룩이 꼭 얼룩말의 뱃잔등 무늬 같았다. 다들 소풍 나온 것처럼 사진찍기에 분주했다.

낮 1시 20분 호롬보 산장에 복귀해서는 점심으로 꼬치구이와 감자튀김, 브로콜리 샐러드를 먹었다. 숙소에 들어와 누워서는 아이폰으로 음악을 들었다. 두통을 덜기 위해서였다. 이것저것 들었다. 록밴드 ‘짙은’의 If와 Secret을 듣는데 갑자기 뜨끈한 물기가 눈가를 적셨다. 저녁 때는 두통이 심해져 식후 처음으로 아스피린 한 알을 먹었다. 통증이 조금은 가라앉는 듯했다.

◆ 가도가도 끝이 없는 구름 '실크로드'

다음날은 6시에 기상, 7시 10분 출발했다. 한국말도 곧잘 하는 가이드가 “가자!”라고 외쳤다. 습도 제로. 발길 닫는 곳마다 흙먼지가 폴폴 일었다. 일명 실크로드라 불리는 사막 평원의 외길. 가도가도 끝이 없었다. 예전에 칠레 광부 구출을 취재하러 갔을 때 본 아타카마 사막 비슷했다. 마주 앞에 보이는 킬리만자로는 몇 시간을 가도 언제나 그 자리에 신기루처럼 떠 있었다. ‘아직도 거기서 그러고 있냐’는 투다. 중간에 구조물이 없어 생기는 착시 현상이었다.

낮 2시쯤 마지막 산장이자 킬리만자로 정상 도전의 전진기지인 키보 산장(해발 4720미터)에 도착했다. 다른 곳과 달리 이곳은 관리사무소, 포터 숙소, 등반객 숙소 각 1개동이 전부였다. 숙소 건물도 마치 전방의 군대 막사 같다. 결전을 앞둔 비장함이 서려 있는 듯했다. 다들 차를 한 모금 마신 후에는 침상에서 일찍 잠을 청했다. 자정쯤 야간 산행으로 정상 정복이 예정돼 있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그 먼 산까지 왜 간 걸까. 걷는 동안에도 묻고 또 물었다. 거기에 대한 답으로는 잡스의 말을 대신하기로 했다. “여행은 그 자체가 보상이다(Journey is the reward).” 여행의 이유를 묻는 것은 인생을 왜 사느냐고 묻는 것과 같다.

여러 날 온종일 걸음만 걸으면서 몸과 마음의 이율배반에 대해서도 생각이 미쳤다. 점차 정상을 향해 고도를 높혀 갈수록 내 몸은 아우성을 쳤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감각이 들고 일어나 ‘이건 미친 짓’이라고 외치는 듯했다. 하지만 머릿속 정신은 홀로 완고했다. 완강한 독재자가 되어 그저 행진 앞으로를 호령했다. 그렇게 사지와 오감을 제압해 5000미터 가까이 높이까지 끌고 갔다. 그런 내 정신이 나는 경탄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나중에는 깨달았다. 몸을 정복하고 난 후 홀로 우뚝 선 정신이 실은 얼마나 허술하고 허망한지를.

저녁 6시쯤 다시 일어나 저녁 요기를 했다. 입맛은 없지만 가능한 한 많이 먹어 뒀다. 마치 기관차 화로에 석탄을 쓸어 넣듯이 스푼으로 먹을 것들을 입으로 퍼날랐다. 그러고는 다시 잠시 눈을 붙였다.

이윽고 11시 30분. 기상 소리에 일어나니 큼지막한 그릇에 끓인 라면이 한 가득 차려져 있다. 각자 챙겨 간 컵라면들을 한데 풀어서 만든 특별 메뉴였다. 뜨거운 국물과 함께 몇 젓가락을 뜨고는 나섰다.

◆ 마지막 6시간 사투 끝의 등정

밖으로 나와 보니 칠흑 같은 밤이었다. 이번에는 가이드가 맨투맨으로 따라 붙었다. 나는 헌칠한 키에 건장한 체격의 카카가 파트너였다. 나이 서른의 경력 7년차 베테랑이다. 그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나도 그의 손을 꽉 잡았다. 무언의 파이팅 다짐이었다. 주위를 보니 그동안 못 봤던 여성 가이드도 채비를 하고 있다.

산행이 시작됐다. 조심조심 한발한발 전진했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 헤드랜턴만이 앞길을 간신히 비춰줬다. 얼마 가지 않아 곧장 경사길로 접어들었다. 갈수록 가팔라졌다.

조짐이 심상치 않았다. 이 날 코스는 그 전까지와는 차원이 달랐다. 뚜렷하지 않은 길은 화산재 모래여서 한 발을 디디면 절반은 미끄러지는 식이었다. 어떤 곳에서는 바위에 손을 짚고 기다시피해야 하는 곳도 있었다.

얼마 만큼 더 가야 하는지,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지, 어디까지 와 있는지 가늠조차 어려웠다. 그저 앞서가는 사람의 헤드랜턴 불빛만 머리 위에서 반딧불처럼 어른거렸다. 언제쯤이면 쉴 수 있는지 기약도 없는 상황이 몸과 마음을 더욱 지치게 했다.

나는 자가 인공호흡을 하는 사람처럼 내 입으로 내쉬기와 들이쉬기를 반복했다. 후우-후우, 흐읍-흐읍을 반복했다. 그래도 입에 들어오는 산소는 부족한 것 같았다-고 뇌가 비명을 질렀다. 도움을 청하거나 누구 말에 귀기울일 겨를도 정신도 없었다. 각자가 혼자만의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포터들이 등산객들의 고산증에 따른 졸음을 쫓고 정신을 깨우기 위해 노래를 불렀다. 유독 청아한 목소리가 있었다. 아까 본 여자 가이드일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돌림노래 소리마저 아련한 자장가처럼 들렸다. 처져내리는 눈꺼풀에도 부릅 힘을 줘야했다.

그렇게 그렇게 기진맥진 상태에 달해, 1차 정상 목적지인 길만스 포인트(해발 5685미터)에 오른 것은 새벽 5시 40분. 출발 이후 6시간의 사투를 벌인 끝이었다. 정말 그랬다. 말 그대로 사투였다.

여전히 사방은 어두웠다. 올라왔다는 기쁨보다 아직 살아 숨을 쉬고 있구나 하는 사실에 그저 안도의 깊은 숨을 내쉴 뿐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찬바람과 함께 매서운 추위가 느껴졌다. (그래도 날씨가 좋은 편이었는데 나중에 들으니 영하 7도라고 했다.) 올라오는 동안의 열기가 식으면서 급강하는 체온을 끌어올리느라 전신이 알아서 떨기 시작했다. 옆의 가이드는 정상은 아직도 더 가야 한다고 했다. 여기서 2시간. 혼자 생각으로는 자신이 서지 않았지만, 가이드 손에 이끌려 무작정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5895미터 우후루봉, "축하한다 여기는 정상"

이 때 내 모습을 본 일행 중 누군가는 나중에 ‘좀비 같았다’고 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가는 중에 동쪽으로 붉은 기운이 번지기 시작했다. 해가 뜨려는 신호였다. 일출을 보기 가장 좋다는 스텔라 포인트(해발 5745미터)로 향했다.

잠시 길을 멈췄다. 눈앞에 장관이 펼쳐졌다. 지평선 위로 붉고 노란 기운의 빛덩이가 꼬물꼬물 고개를 드는가 싶더니 이내 둥근 공이 되어 환한 빛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들고 있던 아이폰 카메라로 연속 촬영을 했다. (DSLR 카메라를 들고 갔지만 무게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숙소에 놔두고 나선 상태였다.)

일출 감상도 잠시. 다시 정상으로 발길을 되돌렸다. 분화구 가장자리를 따라 1시간을 더 갔을까. 아니 그때는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한참 뒤 드디어 먼 발치에 봉우리가 보였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있었고, 또 그만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리로 향해 가고 있었다. 휘청휘청 갈짓자 걸음으로 가는 길에 왼편 아래로 푸른빛의 하얀 빙하가 보였다. 생각보다 더 거대했다. 그 반대편으로는 거대한 화산 분화구가 만든 평원 지대가 내려다 보였다. 장관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장관이긴 한데 가만히 감상할 겨를이 없었다. 그저 숨을 헐떡이며 발을 옮기기 바빴다. 의식도 가물가물했다.

드디어 앞서 가던 가이드가 걸음을 멈췄다. 더 높은 곳을 향한 끝없는 행진이 마침내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오, 하느님. 눈 앞에 목재로 만든 표지판이 보였다. “킬리만자로산. 축하한다. 당신은 지금 5895미터 탄자니아 우후루봉에 와있다.”

기념 촬영을 위해 주머니속 아이폰을 꺼내 들었다. 웬 걸, 그 순간 밧데리가 꼬물꼬물 꺼져 버리는 게 아닌가. 이런 낭패가 있나. 높은 고도와 추위 속에 급방전된 결과였다. 주변에는 우리 일행도 보이지 않았다. 가이드는 다른 사람에게라도 부탁해 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괜찮으니 내려가자고 했다. 그때는 그것으로 족했다. 어떻게든 인증샷을 남겨야겠다는 생각보다 2~3시간을 되짚어 내려갈 길이 더 막막했던 것. 나는 마음이 급했다. 숨도 가빠서 더 오래 있기도 힘들었다. 돌아서서 시계를 보니 7시 40분이었다.

키보 산장에 복귀하자마자 침대에 쓰러져 잤다. 정말이지 숟가락을 들 힘도 없었다. 일단은 자고 싶었다. 헬기가 날 싣고 내려갔으면 하는 생각까지 하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아니, 의식을 잃었다.

◆ 일행 16명12명이 정상까지 완주

깨어나 짐을 챙기다 보니 스틱 하나가 없었다. 모자 위로 띠처럼 둘렀던 헤드랜턴이 사라진 것을 안 것은 그 다음이었다. 물건을 잃어버린 데 대한 낭패감보다도 내 머리가 제 정신을 찾았다는 신호 같아서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한바탕 길고 긴 꿈을 꾼 것만 같았다. 그 사이 대체 내게 무슨 일이 있었던가. 힘들게 올라갔던 비탈길을 미끄러지듯이 내려온 장면만 스틸 사진처럼 떠올랐다. 여러 번 휘청대다가 넘어지기도 했던 것도 같다. 무릎에 상처도 있다. 아마 그 와중에 스틱 하나를 어디엔가 잃어버리고, 헤드랜턴도 달아났으리라.

아이러니하게도 킬리만자로 정상을 갔다왔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는 몸 여기저기의 상처와 그곳에 두고 온 분실물로 남게 됐다. 킬리만자로는 그 때의 갖가지 고통과 상념과 더불어 이제 내게는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각인됐다.

내 예전에 언제 무엇인가에 그렇게까지 전심전력을 쏟아부은 적이 있던가. 단언컨데 없었다. 그 5박6일간의 등정에서 보여줘야 했던 열과 성은 그 동안 내가 일상에서 자신했던 성심성의의 노력이라는 말을 무색케 했다. 킬리만자로는 매 순간 그 이상을 요구했고 나는 거기에 순순히 복종해야 했다. 그래야만 열리는 곳이 킬리만자로의 정상이었다.

다녀온 뒤로 여러 사람이 묻는다. 어땠느냐고. 누구에게든지 이런 얘기부터 한다. 행여 막연한 동경심에서 킬리만자로행을 생각한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라고. 그 만큼 힘들다는 얘기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산행을 마친 직후에 긁적인 내 메모장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사경을 해매다 온 것 같다. 백지수표를 준대도 다시는 못 가겠다. 그런 델 내 발로 갔다왔으니 나로선 잊지 못할 체험이 됐다만.”

좀 더 객관성을 더해 얘기하자면 이렇다. 우리 일행 16명 중 정상까지 이른 사람은 12명이었다. 그 중에는 60대 남녀도 있었다. 어떤 지방 산악회는 회원 6명이 나섰다가 4명만 성공했다. 함께 간 20대 여대생은 성공했지만 50대 아빠는 중도 포기한 경우도 있다. 평균적으로 10명 중 7명꼴로 성공한다는 말이 얼추 맞았다.

당신이 무엇을 상상하고 얼마 만큼 각오를 하든 킬리만자로는 그 이상의 고통으로 다가올 것이다. 반드시 후회의 순간이 찾아든다. 그것도 여러 번. 사투 끝에 정상에 서서도 가슴벅찬 성취감을 즐기기보다는 탈진과 호흡 곤란에 인사불성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하산 걱정도 사태처럼 밀려든다. 산에서 내려온 후에도 한참 뒤, 제 정신이 찾아든 후에야 비로소 거길 내가 갔다왔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이 모든 경고와 으름장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드시는지. 그렇다면 당신은 가야 한다. 아니 내 만류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거기로 향하게 돼 있다. 킬리만자로가 유혹하는 사람은 바로 그런 사람이다. 행운을 빈다. '폴레폴레'의 요정이 그대와 함께 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