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블리 디젤.

100년의 역사를 이어오는 동안 마세라티는 디젤 엔진을 거들떠본 적이 없다. 고성능을 표방하는 브랜드에서 가솔린과 비교했을 때 장점보다 단점이 많아 보이는 디젤을 굳이 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상당수 고급 브랜드에서는 디젤 엔진을 이미 주력으로 쓰고 있다. 기술 개발로 소음과 진동이 크다는 단점이 제법 희석된데다, 초반 가속력을 좌우하는 토크가 높고 연비도 좋다는 디젤만의 장점이 점점 부각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돈 많은 사람들이 기름 값에 신경 쓰겠느냐고 생각하기 쉽지만, 적은 연료로 좋은 성능을 내는 것은 이제 자동차 회사의 기술력을 가늠하는 중요한 잣대다. 포뮬러 원(F1)이나 르망 24 내구 레이스 같은 세계적인 자동차 경주대회에서도 연료 소비 효율은 승패를 가르는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됐다. 돈 많다고 기름 펑펑 써대는 차만 만들어서는 안 되는 시대라는 이야기다.

기블리 디젤.

고급 브랜드를 표방하는 자동차 회사들도 이런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아니, 이들이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는 말이 더 어울린다. 아우디는 지옥의 레이스라고 불리는 르망 24를 디젤 엔진으로 휩쓸더니 이젠 디젤 하이브리드로 우승컵을 거머쥐고 있다. 스포츠카 브랜드인 포르셰의 성장을 이끈 4도어 세단 파나메라와 스포츠유틸리티차(SUV) 카이엔의 경우에도 디젤 엔진 판매 비중이 가솔린 모델을 능가하고 있다.

마세라티 역시 더 이상은 이런 흐름을 거스르지 않기로 했다. 탄생한 지 꼭 100년이 되는 올해 마세라티는 콰트로포르테와 기블리 두 가지 모델에 디젤 엔진을 추가했다. 이 중 기블리 디젤 모델을 시승했다.

기블리 디젤에는 6기통 3.0L 터보 디젤 엔진이 들어갔다. ZF사의 8단 자동변속기와 맞물려 최고 275마력의 힘을 낸다. 초반 가속력을 좌우하는 최대 토크는 61.2㎏·m. 정지 상태서 시속 100㎞까지 끌어올리는 데 걸리는 시간은 6.3초며, 최고 속도는 시속 250㎞다. 최근 인증을 마친 표시 연비는 복합 연비 기준 L당 11.5㎞다.

기블리 디젤.

시동 버튼을 누르고 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새 디젤 모델에 대한 의구심이 있었다. 속도계 바늘이 치솟을수록 강해지는 뒷심과 마세라티의 전매특허인 웅장한 배기음 등이 기존 콰트로포르테나 그란투리스모보다 크게 부족하다면, 이 차를 실패작으로 규정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더구나 기블리는 마세라티가 외연 확대를 위해 가격을 확 낮춰 내놓은 모델이다. 값을 낮추려면 무언가는 포기하고 가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이런 걱정이 기우였음을 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왼쪽에 있는 시동 버튼을 누르자 웅장한 엔진음이 운전자를 맞았다. 가솔린 엔진과 질감이 전혀 다른 디젤 엔진이지만, 엔진음을 작곡한다고 표현하는 마세라티답게 귀를 즐겁게 하는 실력은 여전했다. 거칠게 돌아가는 피스톤 소리는 엔진 밖으로 나오며 절제된 음향으로 바뀌었고, 잘 달리는 차임을 과시하는 도구로 쓰기에 충분했다.

시내에서 주행을 해보면 독일 고급 브랜드 차들보다는 덜 조여놓은 듯, 편안한 느낌이 든다. 단단하게 엉덩이를 받친 시트에서는 약간의 푹신함도 느낄 수 있었고, 머리받침도 매우 편안하게 만들어놨다. 여느 차보다 큼직한 운전대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평범하게 시내를 돌아다닌 느낌은 예상보다 부드럽다는 것이었다. 고성능을 표방하는 세단이지만, 그렇다고 '나는 스포츠카다'라고 내세우는 차도 아닌 만큼 일상생활에서 쓰기에 불편함이 없이 맞춰놓은 셈이다. 여성 운전자가 운전해도 거부감이 없을 정도다.

기블리 디젤.

하지만 발끝에 힘을 강하게 주는 순간부터 차의 성격은 놀랄 만큼 바뀐다. 교차로 맨 앞줄에서 기다리다 좌회전 신호가 켜지자마자 가속 페달을 꾹 밟으며 운전대를 돌려봤다. 뒷바퀴에서 작은 비명이 나며 차는 살짝 미끄러졌고 회전 구간을 통과하자마자 경쾌한 달리기가 시작됐다. 시내에서 장시간 편안하게 몰아보겠다던 마음이 금세 바뀌어 고속도로로 자리를 옮겼다.

고속도로에 차를 얹어놓고 주행을 해보니 진가가 하나씩 드러났다. 우선, 차가 운전자의 의도를 읽으려고 시도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BMW의 3시리즈나 5시리즈에 달린 ZF 8단 변속기는 매우 빠르고 정확하게 변속을 이어간다. 몰다 보면 언제쯤 변속이 될지 미리 맞출 수 있을 정도다. 반면 기블리에 달린 ZF 8단 변속기는 발끝에 가하는 힘에 따라 변속 시점을 당겼다 늦췄다 하는 변화를 확실히 준다.

시속 100㎞에 동시에 도달하는 차라도 어떤 과정을 거쳐 가속되는가에 따라 운전의 느낌은 매우 다르다. 적응하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감을 잡고 나니 오히려 운전자와 차가 한 몸처럼 움직이는 새로운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기블리 디젤.

여기에 차체자세제어장치도 너무 꽉 조여 있지 않아 자동차가 운전자의 움직임을 통제한다는 갑갑함도 덜하다. 자세가 흐트러질만한 순간이면 재빠르게 제자리로 돌려놓는 독일 고급 세단들과 달리 자연 그대로의 힘에 어느 정도는 몸을 맡기도록 설정한 것인데, 좀 더 아날로그의 느낌이라고 표현하면 맞을 듯하다.

거침없이 올라가는 속도계를 보고 나서는 디젤 엔진이라 고속 영역에서 힘의 부족을 느낄 수도 있다는 걱정도 사라졌다. 스포츠 모드로 설정하고 달려보면 높은 RPM(엔진의 분당 회전수) 영역을 충분히 활용하며 언제든 튀어나가도 좋을 상태로 준비를 해주고, 운전대 역시 단단해지며 고속으로 커브를 돌아도 되겠다는 믿음을 준다.

운전대에 붙어 있는 수동변속기인 패들시프트의 반응이 다소 느린 탓에 기어 단수를 높였다 낮췄다 하며 구불구불한 산길을 돌아다니는 손맛이 조금 떨어졌다는 정도가 주행에서 느낀 옥에 티다.

기블리 디젤 연비 측정 결과.

서울시내를 주행한 것을 포함해 수도권과 강원도 평창, 강릉 등을 다녀온 총 주행거리는 570㎞. 주행 시간이 10시간쯤 소요됐던 터라 평균 속도는 시속 57㎞로 나왔고, 평균 연비는 L당 11.4㎞ 정도(8.8L/100㎞)가 나왔다. 주유를 하지 않았는데도 200㎞쯤 더 달릴 여력이 남아있었다. 경쾌하게 속도감을 즐기는 데 들어가는 기름 값이 이전의 가솔린 모델들의 절반 수준인 셈이다.

겉모습을 보면 작지만 날카로운 눈매와 근육질의 몸매가 힘있는 차라는 느낌을 준다. 실내에는 최고급 가죽 소재인 폴크로나 프라우 가죽을 충분히 썼고, 센터페시아(운전석과 조수석 사이 공조장치 등이 있는 곳)는 매우 간결하게 디자인했다. 공조장치 조작을 제외하고 라디오 등의 조작은 모두 8.4인치 터치스크린 안에서 해결하도록 돼 있다.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는 명제에 부합한다.

뒷좌석은 성인 남성이 타기에 넉넉할 정도까지는 아니다. 가운데 바닥도 제법 높이 솟아있어 5명이 장거리 여행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뒷좌석에 ISO FIX 장치가 어린이용 시트를 장착하기 쉽게 생긴 것은 아이를 둔 부모라면 좋아할 만한 요소다. 정속주행장치는 앞차와의 간격까지 조절해주지는 못하는 기본형이다. 유럽 신차 평가 프로그램(Euro NCAP)의 충돌 테스트에서 최고 등급을 받았다.

기블리 디젤 실내.

시승을 마치고 기블리 디젤에 그동안 경험한 마세라티 중 최고 점수를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존 콰트로포르테나 그란투리스모가 분명 더 고급스럽고 성능이 좋은 차다. 하지만 비싼 차 값까지 감안하면 생각은 조금 달라진다. 개인적으로는 콰트로포르테나 그란투리스모의 차 값에는 희소성이 높은 브랜드 가치도 많이 반영돼 있다는 생각을 하던 터다.

하지만 가격은 낮추면서 충분한 성능을 유지했고, 효율이라는 새로운 장점을 만들어낸 기블리 디젤은 마세라티의 진화를 확실히 보여주는 수작이라고 평가를 해도 좋을 듯하다. 형보다 나은 동생인 셈이다. 국내 시장 반응도 뜨거워 마세라티는 올해 전체 판매량을 작년보다 다섯 배 이상으로 끌어올린다는 야심 찬 목표를 세웠다. 가격은 9890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