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태 전 삼보컴퓨터 회장이 7월 28일 서울 명륜동 퇴계학연구원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개인용 컴퓨터를 처음으로 상용화한 기업은 삼보컴퓨터다. 또 최초로 데이터통신을 서비스한 기업은 데이콤이다. 초고속인터넷 서비스를 서비스한 최초 기업은 두루넷이다. 한국 정보화 초석을 다졌던 세 기업을 이끈 인물이 이용태 삼보컴퓨터 창업자(현 퇴계학 연구원 이사장)이다. 이 창업자는 변화무쌍한 정보통신(IT) 분야에서 비즈니스를 일으킨 '벤처 원류(原流)'였다. 재벌 기업이 득세하는 한국 비즈니스 풍토에서 40개가 넘는 벤처 기업을 설립하거나 지분을 투자하며 끊임없이 도전했다.

2014년 5월 7일 오후 3시 이른 더위가 찾아온 서울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 부근 퇴계학 연구원에서 이용태 삼보컴퓨터 창업자 겸 전 회장(81)을 만났다. 명륜동 사무실은 '정보' '벤처' '기술'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책장은 유학(儒學) 서적으로 가득 차 있었고, 각종 서예 작품들이 병풍처럼 낡은 소파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는 어려운 기술 용어들을 쉽게 풀이해가며 절체절명의 순간들, 환희와 좌절의 순간들을 들려주었다. 그의 목소리는 친근했고 힘이 있었다.

- 1980년만 해도 일반인에게 컴퓨터는 매우 낯선 기기였습니다. 삼보컴퓨터 설립 과정이 궁급합니다.

"나라가 부강해지려면 하루 빨리 컴퓨터 산업을 일으켜야 하는데, 나라도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1980년 7월 삼보컴퓨터의 전신인 삼보엔지니어링(1982년 1월 삼보컴퓨터로 변경)을 설립했습니다. 서울 청계천 한구석에서 자본금 1000만원, 직원 7명으로 시작했습니다.

당시 청계천에서 '기쁜소리사'라는 오디오 전문 상점을 운영하는 백창기씨가 일본 샤프에서 나온 소형 컴퓨터를 본떠서 나를 찾아왔었습니다. 나는 이 가게를 인수해 곧바로 컴퓨터 사업을 시작했어요. " 

삼보컴퓨터가 1981년 1월 국내 최초로 개발한 PC 'SE- 8001'.

삼보컴퓨터는 회사 설립 6개월 만인 1981년 1월 국내 최초의 PC ‘SE-8001’을 만들었다. 삼보컴퓨터는 이 PC를 캐나다에 1200대가량 수출했다. 토종 컴퓨터가 해외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것이다. 1990년에는 ‘트라이젬 20XT’를 내놓고 본격적으로 가정용 PC 시장을 열었다. 이때부터 금성(현 LG), 현대 등 대기업이 PC 시장에 진출하면서 국산 컴퓨터 생산붐이 일었다.

1993년에는 ‘잼 패드’라는 PDA(개인휴대단말기)를 독자 개발했다. 440g 초경량 무게에 모뎀을 장착하고 팩스 송수신, 데이터 교환 등이 가능했던 첨단 제품이었다. 1997년 외환 위기로 전체 시장이 얼어 있을 때는 ‘드림시스 61’을 내놓았고 2년마다 주요 부품을 바꿔주는 ‘체인지업PC’로 둘풍을 일으켰다.

- 또 1982년 데이콤 초대 사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1981년 청와대는 체신부에서 전기통신사업을 떼어 내 공사화(公社化)하는 것과 데이터통신 사업을 전담할 회사를 설립하는 것을 추진하게 됩니다. 그전에는 체신부에서 전화도 직접 팔고 설치까지 맡았는데, 정부는 정책을 입안하고 감독하는 기관이니, 장사하는 부문을 분리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데이터통신 전담회사, 즉 한국데이터통신주식회사(데이콤·Data Communication Corporation Of Korea· 2010년 LG유플러스로 합병)가 만들어진 것이 1982년이었죠.

오명 박사(당시 체신부 차관)가 이 일을 주도했는데, 나에게 데이콤 사장을 맡아 달라고 하더군요. 나는 거절하는 의미로 한 가지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데이콤에서 행정전산을 통합하는 시스템을 개발할 테니, 일을 마치면 정부가 비용을 다 내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사실 말이 안 되는 소리죠. 정부 예산이란 미리 따놓고 시작하는 데 선(先)개발 후(後)정산하자는 의미잖아요.”

- 예산을 받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면 더 편하지 않습니까.

“이유가 있습니다. 예산을 따서 일을 처리하려면 프로젝트 하나를 수행하는 데 5년씩 걸립니다. 보통 첫해 사업 타당성 조사를 하고, 그 다음해 본 예산 보고서를 내고 나서 프로젝트를 실행합니다. 예산과 집행에만 5년이 걸립니다. 일부터 해놓고 비용을 정산하면, 1년 만에 마칠 수 있어 진행 속도가 5배나 빨라집니다.”

- 정부가 그러한 조건을 수락했나요.

“데이콤에서 행정 전산까지도 맡아도 좋다는 결정이 났습니다. 또 선투자 후정산 관련해서는 기존 감사원과는 별도로 IT분야의 감사를 맡을 전문기관을 출범시켜 해결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1987년 만들어진 한국전산원입니다. 오명 차관이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 당시 행정전산망은 어떻게 설계했습니까.

“정부 시스템을 만드는 제일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가장 많이 쓰기 때문에 성능이 증명된 IBM 컴퓨터 가져다 놓고 지금까지 썼던 도구나 방법론을 쓰고 개발하는 것이죠. 나는 안전한 방법 대신 미래에 쓸 기술, 10년 뒤에 뜰 기술로 시스템을 개발하자고 했습니다. 한두 개가 아니라 전부 다 새 방법론을 쓰자고 주장했지요.

실제로 행정전산망의 운영체제(OS)로는 공개 소프트웨어인 ‘유닉스’를 택했습니다. 나는 구라파(유럽)의 움직임을 보고 유닉스의 부상을 점쳤습니다. 유럽은 컴퓨터 하드웨어에서 미국에 완전히 뒤진 상태여서 소프트웨어 분야에서는 IBM으로부터 독립하려고 할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려면 유닉스를 활용할 수밖에 없지요. 전길남 박사(당시 KAIST 교수)도 실제로 유닉스를 써보고 지금은 부족한 점이 있지만, 앞으로는 잘 될 것이라고 조언했습니다.

프로그래밍 언어는 차세대 언어인 ‘C’ 를 썼어요. 당시 모두 ‘코볼(COBOL)’을 쓸 때였습니다. 데이터베이스도 IBM 데이터베이스가 아니라 새로 나온 관계형 데이터베이스를 채택했습니다. 통신은 전용선을 깔아서 PC통신·인터넷 접속 때 데이터를 송·수신하는 시간만 요금이 부과되는 패킷교환 방식을 택했습니다. 컴퓨터 자료 입력은 키 펀치(구멍 뚫는 장치)로 할 때인데 전국 동사무소까지 미니컴퓨터를 보급해 직접 입력하자는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1982년 4월 28일 서울 여의도 증권거래소 국제회의장에서 치러진 데이터통신 창립행사

- 그렇게 할 경우 실패 위험은 상당하지 않나요.

“아뇨. 리스크는 별로 없습니다. 유닉스 OS, C 언어, 패킷 교환망 등은 당시에는 널리 쓰이지는 않았지만, 미래에 쓰일 것이 확실한 것들이었습니다. 행정전산망은 깨끗하게 성공했습니다.비용은 IBM이 하는 것보다 10분의 1 수준으로 적게 들었습니다.

이런 방식은 애플 창업주인 스티브 잡스가 내놓았던 제품 개발방식과도 비슷합니다. 잡스는 아이폰과 아이패드 만들 때 직접 만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여기저기 기술을 모아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낸 것이죠.

직원들도 열심히 했지요. 이 일을 시작할 때 직원들 보고 이혼하고 오라고 했습니다. 침대 가져다 놓고 여기서 죽을 작정하라고 말이죠. 그 엔지니어들이 진정한 애국자입니다. 젊은이들이 불평 안 하고 다 해내더라고요. 한국 사람이 똑똑하다는 것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그들은 세계 최고의 기술자들은 아니었지만, 세계 최고의 시스템을 만들어냈습니다.”

- 행정전산망 도입에 반대 여론도 거셌습니다.

"행정전산망 프로젝트는 정부 관료들의 이해관계와 정면으로 충돌했습니다. 당시 내무부는 지방자치제가 시행되기 전이어서 모든 시, 군, 면의 예산을 총괄하고 있었습니다. 내무부는 행정 전산을 자체적으로 구축하기 위해 장기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데이콤 때문에 예산이 제로가 되었습니다. 내무부 공적 1호가 이용태였습니다. IBM도 제품을 팔 수 없어서 불만을 터뜨렸스니다. 그들은 제 사생활을 캐며 흠 잡을 것을 찾았습니다.

당시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이 저를 부르더니 이 박사를 공격하는 비난 투서가 쏟아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김 수석은 이 박사를 신뢰하고 있으니, 용기를 잃지 말고 프로젝트를 성사시키기 바란다고 하더군요. 행여 행정전산망 프로젝트 때문에 삼보컴퓨터가 덕을 봤다는 이야기가 나올까봐 오히려 삼보컴퓨터에 불리하게 조건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 행정전산망이 개통되고 나서 어떤 효과가 있었나요.

“각 부처에 있는 데이터베이스를 한 개로 통합했습니다. 경찰청, 국세청, 병무청에서 클릭 하나로 각종 민원서류를 뗄 수 있는 것도 행정전산망을 통합한 결과입니다. 한국이 전자정부 세계 1위를 하는 바탕도 행정전산망 통합 프로젝트 덕분이었습니다. 이 대형 프로젝트를 수주하기 위해 삼성SDS, LG CNS 등 대기업 계열 시스템통합(SI)업체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일종의 소프트웨어 산업이 생긴 것이지요.”

- 88 서울올림픽도 한국 정보화를 앞당기는 역할을 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박세직씨(당시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가 올림픽을 키웠습니다. 기술적인 문제 책임자는 오명 체신부 차관이었습니다. 88올림픽 경기에 관한 자료수집은 성기수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시스템공학연구소장이 했고, 출입자 관리 및 대회 운영은 쌍용소프트웨어가 맡았고 전 세계에 수집한 데이터를 나눠주는 것은 데이콤이 맡았습니다. 전체 코디네이터는 오명 차관이었고요. 성기수 박사팀은 예산이 부족하다고 했지만, 내 생각은 달랐습니다. 컴퓨터는 정보를 받아 가공해서 내놓는 게 일인데 1위부터 10위까지 순위를 발표하는 올림픽처럼 컴퓨터로 처리하는 것만큼 쉬운 게 없다고 오명 차관에게 이야기했습니다."

- 한국정보통신 협회장을 20년이나 할 정도로 한국 IT의 상징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여러가지 제의가 많이 받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숱한 사업 기회가 있었지요. 그중에 아쉬웠던 기회 세 가지를 말씀드리죠. 먼저 벤처캐피탈을 하려다가 못한 겁니다. 해외 순방 당시 경제기획원 고문이었던 김기환 박사의 소개로 전두환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대통령은 경제 부흥에 관심이 많았지요. 저는 대한민국이 잘 살려면 기술력을 높여야 하고 기술력을 높이려면 벤처캐피탈을 만들어 미국에 가는 것이 해법이라고 했습니다. 미국에서 벤처캐피탈 사업을 하면, 최신 기술 트렌드를 알 수 있고, 한국 기업과의 합작 기회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로 벤처 자금까지 마련됐지만, 데이콤 사장을 맡는 덕에 하지 못했습니다. 한국개발투자 초대사장은 행정개혁위 위원장을 지냈던 김영옥씨가 맡았습니다.

포항제철(현 포스코)이 정보산업에 투자하려고 했던 일화도 있습니다. 데이콤 사장 재직 중이었으니 1986년쯤 일인데, 고(故) 박태준 포철 회장이 다른 사람을 통해 연락이 왔습니다. 광양제철소 설립이 끝나 투자 여력이 있다며, 1년에 1조원씩 10년간 정보산업에 투자하려고 한다고 했지요. 나는 포스데이타(현 포스코ICT) 고문을 맡아 63빌딩의 한 사무실에 출근했습니다. 그런데 박 회장이 포철 회장 자리를 내놓고 민정당 중앙위원회 의장으로 간 후에는 소식이 없었습니다. 또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박 회장은 정치적으로 실각해 일본에 있었지요. 훗날 박 회장을 만났는데, 그는 그때 투자했더라면 포철의 정보사업 이익이 철강 이익보다 커졌을 것이라며 아쉬워했습니다.

97년 6월 인천 송도에 소프트웨어 집적 단지인 미디어밸리 추진위원장을 맡았습니다. 인천 송도에 실리콘밸리나 인도 소프트웨어 단지를 만들자는 계획이었는 데 결과적으로 잘 안 됐어요. 정보통신부가 좀 더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인천 시장이 시의원을 잘 설득했다면 송도에 세계 유수 소프트웨어 기업이 들어섰을 텐데 아쉽습니다."

- 1975년 설립한 동양전산주식회사를 비롯해 삼보컴퓨터, 두루넷, 나래이동통신, 엘렉스, 큐닉스, 정보시대, 아이네트, 소프트뱅크코리아, 휴먼컴퓨터, 솔빛 등 40개가 넘는 벤처 기업 설립에 직간접으로 참여했습니다. 또 삼보컴퓨터 출신들이 만든 벤처 기업도 많습니다. 벤처 비즈니스를 중요하게 생각한 이유가 있습니까?

"전자기술연구소 등 12년간의 연구소 생활을 끝내고 벤처 기업을 시작했을 때 컴퓨터 관련 업체 100개를 만들자고 생각했습니다. 정보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벤처 기업이 필요하다는 것을 틈만 나면 강조했어요. 정보 산업은 위험이 큰 사업이기 때문에 성공 확률이 높지 않습니다. 벤처 여러 개를 만들어야 합니다. 1980년 초 오명 박사가 데이콤 사장직을 제안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모았던 벤처 자본을 들고 미국 실리콘밸리로 갔을 겁니다. 그랬다면 한국 정보통신산업이 늦어졌을 것입니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