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중반까지 '1인 1펀드' 시대라고 할만큼 펀드는 가장 대표적인 재테크 수단이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경기침체가 계속되고 주식시장 역시 몇 년째 지루한 옆걸음 장세를 이어가면서 펀드의 유행도 한 풀 꺾였다. 계좌를 개설하기 위해 긴 줄을 늘어선 채 몇 시간을 기다려야 가입할 수 있었다는 '바이코리아펀드'나 '인사이트펀드'의 열풍도 어느덧 옛 시절의 이야기가 됐다.
그러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오랜 기간 꾸준히 높은 수익률을 올리며 선전하고 있는 펀드도 있다. 숨은 저평가 우량주를 발굴하고 한 발 먼저 증시의 흐름을 분석해 안정적인 성과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높은 수익률을 올려 제2의 펀드 열풍을 이끌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자산운용사들의 투자책임자(CIO)들을 차례로 만나 그들의 투자철학과 운용방향 등에 대해 들어봤다. [편집자주]

“이제는 물병 안에 물을 새로이 채우는 게 아니라 이미 채운 물을 정화해서 마시는 시대입니다. 저성장 국면에서 진정한 가치주들이 빛을 발하는 때가 온다는 의미죠.”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의 투자책임자(CIO)인 이채원 부사장은 최근 경제 성장률이 정체되고 있는 상황에서 가치주들은 어떤 흐름을 보일 지를 묻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다. 그는 “최근에는 조금이나마 성장 가능성이 있는 종목이라면 투자가 몰리면서 주가가 성장 전망치 수준을 뛰어넘는 일이 많다”며 “성장에 대한 기대감이 사그라들수록 자산가치가 높고 매년 일정 수준의 이익을 내는 가치주들이 더 많이 주목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형 가치투자의 1인자’라는 별명다운 발언이다.

이채원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 CIO는 "저성장 국면이 지속될수록 자산가치가 높고 매년 안정적인 이익을 거두는 종목들의 가치가 더 주목받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채원 부사장은 지난 2006년 2월 가치투자 전문 자산운용사인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이 설립될 때부터 CIO를 맡아 지금껏 회사를 이끌고 있다. 이 회사의 대표상품인 ‘한국밸류10년투자신탁 1호(주식)’는 2006년 4월 18일 설정된 이후 지금껏 누적 수익률이 25일 기준으로 166.3%에 이른다. 같은 기간 42.3% 오른 코스피지수에 비해 약 4배 가까이 높은 성과를 낸 셈이다.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이 내놓는 상품들은 대부분 ‘10년투자’라는 단어가 붙는다. 자산가치나 실적, 기초체력이 탄탄하지만 주가는 저평가 돼 있는 기업들을 발굴한 후, 제 값을 인정받을 때까지 보유해 높은 수익률을 얻겠다는 의미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경기침체 등의 과정을 거치며 10년투자 펀드는 종종 다른 주식형펀드의 평균 수익률에 못 미친 적도 있었지만, 장기간 수익률은 최상위 수준을 유지해 왔다.

◆ 성장한계 부딪히니 高PER주로 더 몰려…저성장 계속될수록 가치주 부각

이 부사장은 저성장 국면에서 오히려 증시는 성장주 중심의 흐름을 보이고 있다고 분석했다. 성장하는 기업들이 줄어들수록 오히려 조금이나마 더 성장 가능성이 있는 일부 종목이나 업종으로 투자가 몰리며 주가가 제 가치보다 더 크게 올랐다는 것이다.

그는 “국내와 미국 증시의 최근 3개월간 흐름을 봤더니 PER(주가수익비율)이 높은 주식일수록 주가가 더 올랐다”며 “성장에 대한 갈증이 심해지면서 NAVER나 다음, 화장품 관련주들처럼 성장 전망이 있는 기업들로 투자가 집중돼 적정 수준의 몇 배 이상으로 주가가 오르고 있다”고 말했다.

성장주 장세가 계속될수록 PER이나 PBR(주가순자산비율)이 낮은 가치주에 투자하는 펀드의 수익률은 계속 떨어지는 것이 아닐까? 이에 대해 이 부사장은 “증시의 기대치만큼 실적이 따라오지 못하는 종목들이 언제까지 오를 수 있을 것인가”라고 반문하며 “성장이 한계에 부딪힐수록 부동산이나 현금이 풍부해 주주들에게 분배할 식량이 많은 종목, 즉 가치주들이 더 부각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더 이상 돈을 크게 벌지 못하면 투자자들은 이미 과거에 성장하면서 쌓아놓은 자산을 분배하라는 요구를 하거나, 주목받지 못했던 쪽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며 “최근 배당주나 우선주들이 치솟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 계량 모델 도입하고 해외로 눈길 돌려

이 부사장은 최근 주식시장에서 기업가치에 비해 값이 싼 주식을 찾아내는 것이 예전에 비해 어려워졌다고 털어놨다. 유가증권시장은 물론이고 그 동안 외국인이나 기관의 관심이 덜했던 코스닥시장에서도 더 오를 여력이 있어보이는 종목으로 투자가 늘면서 가치주 기준에 부합될 만한 종목 자체가 줄었다는 것이다.

이 부사장은 “중·소형주 중에서는 값 싼 주식이 확실히 줄었다”며 “최근에는 다시 대형주들을 중심으로 저평가 종목을 찾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투자대상을 찾는게 어려워지면서 과거에 비해 종목 선정이나 매수, 매도를 하는 작업이 보다 치밀해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채원 CIO는 "다양한 계량 모델이 도입되고 해외 증시로 발길을 넓히는 등 최근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의 가치투자가 진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과거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의 투자 패턴은 낮은 PER, PBR 종목 가운데 업종 내 지배력이 높고 매년 꾸준한 이익을 거두는 종목을 발굴해 장기 보유하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투자종목이 한국전력공사다. 그러나 장기 보유했던 주요 종목들의 주가가 치솟아 더 이상 가치주로써 매력을 잃어가고, 종목 발굴이 까다로워지면서 최근에는 ‘밸류에이션 기업 모델’이라는 방식을 자체 개발하는 등 다양한 계량 모델이나 시스템화 작업을 통한 가치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이 부사장은 지금껏 국내 주식과 채권에만 투자했던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이 2~3년 뒤에는 해외 가치주 펀드를 출시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특히 주목하고 있는 쪽은 일본과 중국, 동남아 등 아시아 시장이다. 실제로 이 부사장은 고교 시절을 일본에서 보냈고, 한국투자증권의 전신인 동원증권에 입사한 후 약 5년간 국제부와 일본 법인 등에서도 근무한 경험이 있다.

그는 “현재 자산운용부 직원들이 팀을 나눠 일본, 중국, 동남아 증시와 주요 기업들에 대해 스터디를 진행하고 있고 이전에 비해 해외 출장 횟수도 늘려 탐방을 진행하고 있다”며 “이들 증시의 가치주에 투자하는 ‘아시아밸류펀드’(가칭)가 곧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고 말했다.

◆ “삼성전자가 배당 늘리면 슬픈 일”

최근 일부에서 기업의 사내유보금을 풀어 배당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데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는 “삼성전자(005930)와 같은 기업이 배당을 하는 것은 슬픈 일”이라고 말했다. 수출을 통해 돈을 벌고, 계속 신규 상품을 내놓아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해야 할 기업들이 투자의 실탄이 돼야 할 유보금을 주주들에게 풀어버리는 것은 안 된다는 설명이다.

이 부사장은 “배당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그러나 그는 “성장이 불투명하고 내수시장 안에서 안정된 이익을 얻는 한전이나 도시가스 사업 관련주 같은 종목들은 배당을 하는게 맞지만,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는 투자를 통해 ROE(자기자본이익률)을 유지하는게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주주들이 원하는 것은 배당으로 단기적인 이익을 얻는 게 아니라 매년 꾸준히 주가가 오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부사장은 최근 정부가 막대한 자금을 풀고 부동산 규제를 완화해 경기를 살리겠다고 나선 점을 주목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많은 전문가들이 정부 대책에도 불구하고 내수가 쉽사리 돌아서긴 어렵다고 하는데, 단기적으로는 상황이 개선될 여지도 충분하다고 본다”며 “내수경기 민감주나 금융주 등의 투자를 늘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또 “유통주 등으로 정책의 효과가 확산되려면 부동산 시장이 되살아나고 시중에 풀리는 돈이 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