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통상자원부가 10년만에 자동차 연비를 사후 조사하면서 미국에서 ‘연비 과장’으로 거액의 배상금을 문 현대차 싼타페에 대해서는 ‘합격’ 판정을 내린 반면, 크라이슬러·BMW·아우디·폴크스바겐 등 미국·유럽차량에 대해서는 ‘불합격’으로 판정해 해당 자동차 회사가 크게 반발하고 있다.

특히 이들 수입차들은 “한국 정부가 지정한 조사기관에서 연비측정을 받아서 제출했는데, 제출 당시에는 판매를 허용해 놓고, 2~3년이 지난 후에 ‘불합격’ 판정을 내린 것은 명백한 ‘비관세 장벽’으로, 한국이 미국·EU(유럽연합)와 체결한 자유무역협정(FTA)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우리 정부의 일관성 없는 자동차 연비 정책이 FTA협정과 관련된 무역분쟁으로 치달을 경우 현대·기아차 등 국산 자동차가 미국·EU 시장에서 차별 대우를 받는 등 불이익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 산업부의 주먹구구식 행정, 통상 마찰로 이어지나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달 말 국토교통부와 함께 일부 승용차의 연비 재검증 결과를 발표했다. 업체들이 신고한 연비가 부풀려져 있다는 지적 때문이었다.

국토부는 당시 “현대차의 싼타페DM R 2.0 이륜구동 모델과 쌍용차의 코란도S 일부 모델의 연비가 과장됐다”고 밝혔고 산업부는 “과장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세종시 국토부와 산업부 이정표 모습. 국토부와 산업부는 차 연비 사후 규제권을 두고 이권 다툼을 벌이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산업부는 크라이슬러의 그랜드체로키, BMW 미니 등의 연비가 과장됐다고 밝혔다. 산업부가 승용차 연비가 과장됐다고 밝힌 것은 사후 연비 검증을 담당한지 10년 만에 처음이었다. 게다가 일부 차량은 2년 전 정부 지정 기관으로부터 연비 적합 판정을 받은 차종이었다. 2년 만에 정부가 지정기관의 연비판정 결과를 완전히 뒤집은 것이다.

수입차 업체들은 황당하다는 입장이다. 한 수입차 업체 관계자는 “정부 입장이 손바닥 뒤집듯 이렇게 갑자기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당황스럽다”고 말했다. 한 자동차 업체 관계자는 “국토부가 승용차 연비가 과장됐다고 들고 나오자 산업부도 뭔가 내놔야 했던 상황이었고 수입차 일부 업체의 연비가 과장됐다고 적발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일부 수입차 업체들은 산업부에 연비 측정을 한 번 더 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산업부는 “기준이 강화돼 연비가 과장됐다고 결과가 나왔으니 그냥 받아들이라”는 입장만 반복하고 있다.

산업부의 뒤늦은 제재는 자유무역협정(FTA)에 따른 통상 마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 계속해서 나온다.

FTA 자동차 관련 규정에 따르면 미국에서 생산하고 미국의 안전기준을 통과한 차량의 경우 국내 안전기준을 준수한 것으로 판단해 따로 재검증을 받을 필요가 없다. 만약 우리 정부가 안전기준의 하나로 연비를 관리하면서 과징금을 부과할 경우 미국 측이 반발할 수 있다.

특히 연비 재검증에 따라 과징금을 부과하게 될 경우 FTA 상대국이 일종의 ‘비관세 장벽’으로 인식해 문제 삼을 수 있다. 실제로 미국 자동차 회사인 크라이슬러는 일련의 문제와 관련해 미국 대사관, 미국 무역대표부(USTR)와 논의를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이 문제를 제기하면 극단적으로 우리 자동차 업체가 미국 시장에서 차별을 받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다. 산업부 관계자는 “FTA 규정에 따라 양국이 사전에 만나 문제 사항을 조율하고 최대한 우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며 “하지만 해결이 안되면 한미공동위원회의 패널들이 규정 위반 여부를 심사하고 문제가 된 규제를 철폐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패널 결정에도 해결이 제대로 안된다고 상대국이 인식할 경우 드물지만 보복조치가 생길 수 있다”며 “우리나라 자동차가 해외 시장에서 차별 받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 수입차 업계 관계자는 “우리 정부의 갈팡질팡 연비정책으로 통상 마찰의 실마리를 제공한 것은 문제가 있다”며 “해외 시장에서 우리 자동차가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 車 산업 경쟁력 강화 방안 필요…과감한 시설 투자·관련 인재 육성해야

전문가들은 자동차 연비는 우리나라 차 산업이 수입차 업체들보다 기술력에서 밀리고 있다는 대표적인 예라며 자동차 산업 자체에 대한 경쟁력 강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자동차 산업에 대한 우리나라 경제의 의존도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올해 1월 기업 경영평가사이트인 'CEO스코어'가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최근 5년간 우리나라 경제에서 삼성그룹과 현대차그룹이 차지하는 비중을 조사한 결과 2012년 국내총생산(GDP) 대비 두 그룹의 매출 비중은 35%를 기록했다. 삼성이 23%, 현대차가 12%였다. 4년 전인 2008년 두 그룹의 비중이 23% 수준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쏠림 현상은 가속화 되고 있다. 이로 인해 두 업체의 위기는 우리나라 경제의 위기로 비치기도 한다.

그럼 자동차산업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어떤 점에 집중해야 할까.

산업연구원 기계·전자산업팀 조철 팀장은 “국내 자동차 생산 규모는 1990년대 후반과 별 차이가 없는 480만대 수준”이라며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시설 투자 등을 늘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조 팀장은 “해외 생산공장 증가로 매출이 늘고 국내 부품업체 역시 덕을 보고 있지만 한계가 있다”며 “국내 생산량이 늘지 않으면 질적 성장에도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일본차는 하이브리드 부문에서, 독일차는 디젤 엔진 분야에서 강점을 갖고 있다. 이처럼 우리 자동차 산업만의 원천 기술 확보도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국민대 허승진 자동차공학과 교수는 “독일은 자동차 공학부가 공과대학에 버금가는 규모로 크고 차 업체의 전폭적인 지원이 이어진다”며 “우리나라는 관련 분야에 대한 산학 협력이나 연구개발, 인재육성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