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열린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방한 국빈 만찬장에는 10만원대 레드와인인 '핑구스 PSI 2011'(13만원)이 식탁 위에 올랐다. 스페인 중부에 있는 도미니오 드 핑구스에서 만드는 이 와인은 80년 이상 된 포도나무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든 술로 이른바 '컬트와인'으로 불리는 소량 생산 와인이다. 지난해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에서 쓰인 와인(미국 파니엔테 카베르네 소비뇽)이 31만5000원이었던 것에 비하면 값이 절반도 안 된다.
그동안 고급 와인이라고 하면 무조건 가격이 수십만~수백만원대의 와인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최근 국내 시장에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고품질인 컬트와인들이 국가 정상 만찬이나 대기업 행사 등에 등장하며 인기를 끌고 있다.
컬트와인은 연간 생산량이 최대 2만4000병을 넘지 않아 희소성이 있으면서 부티크(boutique·작은 점포라는 뜻) 와이너리에서 만들어지는 와인을 지칭하는 일종의 마케팅 용어다. 해외에서는 200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유행했으며 블루칩와인, 차고(車庫)와인 등으로도 불린다.
◇이건희 회장도, 배우 장동건도 컬트와인 애용
지난해 10월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진행된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20주년 기념 만찬'에도 컬트와인인 독일 발타사 레스의 화이트와인 '모노플 리슬링'이 등장했다. 가격은 6만원선. 와인을 공급한 업체 관계자는 "삼성그룹 만찬 행사에서는 오너 일가가 직접 와인을 선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며 "와인 애호가인 이 회장이 만찬에서 6만원짜리 와인을 올린 것이 업계에 한참 회자됐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지난해 72세 생일잔치에서 최고급인 프랑스 돔페리뇽 샴페인뿐 아니라 20만원대 컬트와인인 미국 팔메이어 샤도네이 화이트와인도 올렸다.
배우 장동건이 즐겨 마신다는 프랑스의 부티크와인 '롱그독' 레드·화이트의 가격은 3만5000원이다. 프랑스 남부의 랑그독(Languedoc) 지역의 이름을 패러디한 이 와인은 라벨에 강아지 그림이 그려져 있어 독특하다. 2010년 G20 정상회의와 2012년 핵안보정상회의에서는 동아원이 미국 캘리포니아 나파밸리에서 운영하는 소규모 와이너리 다나 에스테이트의 레드와인 '바소'(13만5000원)가 쓰였다. 라벨에는 구본창 작가의 달항아리 사진이 그려져 있다. 2012년 카자흐스탄 대통령 방한에서도 20만원 안팎의 미국 소노마 3대 컬트와인으로 알려진 키슬러 피노누아 레드와인이 쓰였다.
◇"지나쳤던 와인 값 거품은 꺼지는 중"
국내에서 컬트와인이 인기를 끌기 시작한 이유는 와인 대중화와 맥락을 같이한다. 소비자들이 와인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접하면서 가격과 품질을 꼼꼼히 따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영동대 와인발효식품학과 유병호 교수는 "2000년대 초반까지 국내 소비자는 비싼 와인에 대한 선호도가 굉장히 높았지만 이제는 전문가 수준의 애호가들이 가격 대비 성능이 좋은 와인을 찾으면서 컬트와인이 인기를 끌고 있다"며 "컬트와인을 생산하는 와이너리 간에 경쟁이 붙으면서 가격도 점점 하락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신근중 이마트 주류 담당 매니저는 "과거에 고급 와인이라고 하면 무조건 한 병에 수십만원 이상이라고 생각하는 소비자들이 많았고 와인 수입업자들도 그런 상황을 일정 부분 악용했다"며 "요즘에는 와인 업체들도 컬트와인을 비롯해 저렴하지만 좋은 와인을 골라서 수입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국내 와인 시장에 새로운 수입사들이 대거 뛰어들고 특정 지역, 특정 품종만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회사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컬트와인
소량 고품질 와인을 뜻하는 용어. 1980년대 초반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등장했고 1990년대 중반 신흥 와인 업자들이 좁은 땅에서 독특한 개성을 살려 만든 와인이 많아지면서 생겨났다. 2000년 미국의 와인 전문 잡지 '와인 스펙테이터'에서 컬트와인을 집중 소개하면서 유명해졌다. '블루칩 와인' '차고 와인'이라고도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