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DX·반도체부터 대전엑스포·천리안까지 대한민국 정보통신 혁명 이끌어

1980년만 해도 한국의 정보통신 기반은 열악했다. 인구 100명당 유선전화 보급률 7.2%(미국 79.1%). 전화를 설치하려면 1년 가까이 기다려야 했고, 전화 설치비가 서민주택가격과 맞먹었다. 20년 후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2001년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국제전기통신연합(ITU)이 발표한 초고속인터넷 보급률 1위를 기록했다.

오늘날 각종 온라인 서비스가 작동하는 기반, 즉 대한민국 정보통신 인프라의 설계 과정과 고도화 과정을 확인하기 위해 1982년 전기통신서비스 사업을 전담할 조직인 한국전기통신공사(현 KT)의 출범 과정, 1983년 데이터 통신 사업을 전담할 한국데이터통신주식회사(현 LG데이콤) 설립 과정, 1986년부터 본격화한 행정전산망 사업 등을 취재했다.

지난 5월 1일 서울 삼성동 동부그룹 금융센터 집무실에서 만난 오명 전 부총리겸 과학기술부 장관이 저서 ‘30년 후의 코리아를 꿈꿔라’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2014년 5월 1일 오전 11시 오명 前 부총리 겸 과기부 장관(74)을 서울 삼성동 동부그룹 금융센터에서 만났다. 그는 전두환 대통령 시절 대통령경제과학비서관, 체신부 차관 재임 중 한국전기통신공사와 한국데이터통신을 출범시켰고, 전전자교환기(全電子交換機,TDX)·반도체(4MD램)·수퍼미니컴퓨터 개발사업 등을 선두에서 지휘했다. 1996년부터 1999년까지 동아일보에 재직하면서 정보화 캠페인을 이끌었고 노무현 정부에서 발탁돼 부총리 겸 과학기술부 장관을 역임했다.

오 전 총리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흐트러짐이 없는 자세로 우선 질문의 요지를 차분히 메모했다. 인터뷰 취지를 파악한 이후 그는 연도와 일시, 주요 인명을 일일이 언급하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또 불편부당하다는 느낌을 주지 않도록 완곡한 표현을 썼지만, ‘소신’ ‘추진력’ ‘책임’과 같은 단어도 비교적 자주 언급했다. TDX 개발 과정을 설명할 때는 배수진을 치고 진격하는 육군 소령처럼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 1994년 KT가 ‘코넷’ 서비스에 나서면서 일반인들도 인터넷에 가입할 수 있게 됐습니다. 우리나라 인터넷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비결이 있을까요.

“인터넷이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닐 것입니다. 한국 인터넷 역사도 누구부터 시작했다고 단정 지어 말할 수도 없고 각 분야에서 기술이 조금씩 발전해 온 결과라고 해야겠지요. 인터넷 역사도 ‘정보화’ 혹은 ‘정보화 혁명’이라는 큰 물결에서 봐야 할 것입니다. 특히, 정보올림픽이라고 불렸던 1988년 서울올림픽과 1983년부터 준비를 시작하고 1987년부터 본격적으로 개발에 착수한 국가기간 전산망 사업 등이 한국 소프트웨어 개발과 데이터통신을 획기적으로 도약시키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한국데이타통신이 운영한 WINS 이용 모습(왼쪽). 오른쪽은 88 서울올림픽 통신운영 성공다짐대회.

-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어떤 일이 있었나요.
"큰 대회를 치르려면 대회 경기 운영 시스템, 종합 정보망 서비스, 대회 관련 지원 시스템 등 엄청난 규모의 통신 및 전산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당시 많은 사람이 1984년 LA올림픽 때 썼던 소프트웨어를 구매해 서울올림픽에도 쓰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LA 올림픽 때 쓴 소프트웨어는 그보다 8년 전인 몬트리올 올림픽 때 썼던 소프트웨어에요. 간단히 설명하면 중앙집중식으로 프로그램이 설계돼 있어서 하나만 바꾸려고 해도 전체 프로그램을 손 대야 하는 구닥다리 시스템이었습니다.

내가 84년 LA 올림픽 때 전자IT 조사 담당으로 갔었는데, 경기 결과가 바로 안 나오고 2시간, 4시간, 8시간까지 뒤늦게 나올 때가 있었어요. 서울올림픽에서 12년이나 된 낡은 프로그램을 쓸 수는 없었습니다. 올림픽 조직위원회에는 체신부가 모든 것을 책임지는 조건으로 대회 운영 시스템과 소프트웨어를 국내에서 개발하는 걸로 결정했습니다.”

체신부(1994년 정보통신부로 개편 후 2008년 지식경제부로 통폐합, 2013년 미래부에 통합)는 서울올림픽의 통신 지원을 위해 1986년 2월 체신부 장관을 지원위원회 위원장으로, 체신부 차관을 전산운영협의회 의장으로 하는 올림픽 지원체계를 구축했다. 오명 회장이 체신부 차관 시절이었다. 서울 올림픽 대회전산시스템은 경기운영시스템(GIONS), 종합정보망서비스(WINS), 대회관련 지원시스템(SUPPORT)으로 구분되는데, 자이온스(GIONS)는 한국과학기술원과 시스템공학센터, 윈스(WINS)는 한국데이타통신, 지원시스템은 쌍용컴퓨터와 한국전산주식회사가 각각 담당했다.

“성기수 박사팀이 이끈 서울 올림픽 경기운영시스템 ‘자이온스’는 LA올림픽과 달리 24개 경기장마다 독립된 시스템을 놓고 전체로 연결되도록 했고 경기장마다 백업 컴퓨터를 하나씩 뒀어요. LA올림픽 시스템처럼 복잡하지 않았기 때문에 프로그램 바꾸려면 독립된 컴퓨터에서 얼마든지 바꿀 수 있었고 고장도 없었어요.

88올림픽 때 또 다른 최고의 서비스는 대회 결과를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원스’였어요. 이용태 박사가 사장으로 있었던 데이콤이 윈스를 개발해 텔렉스 가입자가 올림픽 정보를 국내외 송신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뉴욕타임스 데스크가 뉴욕에서 앉아서 경기 결과를 받아볼 수 있도록 한 셈인데, 오늘날 인터넷과 같은 개념의 서비스를 처음 선보였던 것이지요.

성기수 박사팀과 이용태 박사팀이 의견이 맞지 않을 때는 체신부가 나서서 조율하느라 애를 먹기도 했지만, 우리나라 기술로 도저히 안 될 것 같았던 시스템을 만들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정보올림픽 우리가 치른 셈이었지요.”

-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고 나서 본격적으로 국가망 전산화에 나섰습니다. 1500억원 규모의 행정전산망 통합화 프로젝트가 가장 규모가 컸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만 해도 각 부처가 제각각 IBM 컴퓨터를 구매해 전산시스템을 구축하는 식이었습니다. 전산을 잘 모르니, 거의 영수증을 찍어주는 수준이었습니다. 1993년 행정망·금융망·교육연구망·국방망·공안망 등 5대 공공 부문 전산화 계획이 만들어지고 1996년부터 우선으로 행정전산망에 손을 댔습니다.

온 나라가 IBM에 중심으로 돌아갈 때인데, 오픈 소스였던 유닉스 운영체제를 과감히 선택했습니다. 유닉스를 선택하면 IBM 컴퓨터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컴퓨터에도 연결할 수 있었거든요.

정부가 구매처가 되어 줄 테니, 하는 김에 수퍼미니컴퓨터도 만들자고 욕심을 부렸지요. 이 와중에 ‘톨러런트’ 사건이 터져 곤혹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그다음에 우리 손으로 개발한 컴퓨터가 타이컴(주전산기, 호스트컴퓨터)이었습니다.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른 자신감 덕분에 행정전산망 통합화에도 가속도를 붙였지만, 각 부처에서 독립적으로 운용하던 것을 청와대가 중심이 돼 기간 전산망으로 묶으면서 부처 반발이 정말로 거셌습니다.

지금 전자정부 수출을 많이 하는 데, 이 행정전산망이 토대가 된 것입니다. 이 실무 작업을 담당한 것이 데이콤이었습니다. 학문적으로는 전길남 박사팀이 연구 업적이 의미가 있겠지만, 실용화한 업적에서는 데이콤과 이용태 사장을 평가해줘야 할 것입니다. 이 사장은 지금 퇴계학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는데,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한국 정보화를 이끌었다는 것이 재미있는 스토리지요.”

자료, 한국정보화 진흥원 ‘2011년 국가정보화백서’

 - 인터넷도 데이터 통신이라는 큰 틀에서 봐야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네, 그렇습니다. 또 한 가지 더 있습니다. 1980년대 들어 데이콤의 정보문화센터가 20년 동안 정보화 운동을 꾸준히 했다는 점입니다. 서울에서 농어촌까지 지역 사무소를 만들어 국민에게 정보화 중요성을 알렸어요.

또 하나 빠질 수 없는 것이 1993년 대전 엑스포입니다. 한국이 정보화 사회 진입에 필요한 국민 교육을 엑스포 현장에서 다 했거든요. 일반 가정에 PC가 없을 때인데, 대전 행사장에 PC 2000대 이상을 깔아 누구나 만져볼 수 있게 했고 컴퓨터 예술과 같은 첨단 분야도 전시했습니다.”

1993년 열린 대전 엑스포는 108개국 33개 국제기구와 1400여만명의 관람객을 유치하면서 당시 전문가들로부터 역사상 ‘가장 성공한 엑스포’라는 평가를 받았다. 오명 회장은 대전엑스포 조직위원장을 맡았다.

 - 조금 과거 이야기를 들려주십시오. 뉴욕주립대에서 전자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72년 귀국, 육사 교수 생활과 국방과학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근무하다 행정 전문가로 변신합니다. 행정고시 출신이 아닌 과학자 신분에서 청와대에 들어가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1980년 전두환 대통령 시대가 열렸고, 전 대통령이 ‘당신이 경제 대통령이야’라고 할 만큼 김재익씨(당시 경제수석비서관·작고)가 신뢰를 받았습니다. 김 수석은 통신 산업과 전자 산업 육성에 관심이 많았는데, 적임자를 물색했고 내게 함께 일할 것을 제의했습니다.”

- 1980년 10월부터 8개월 동안 대통령 경제수석비서실 과학기술비서관(2급)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당시 청와대 분위기를 말씀해주십시오.

“당시 청와대 우리팀에는 이상하게도 전자공학 전공자들이 많았고 전자공업 육성이 화두였습니다. 김재익씨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경제기획원 기획국장일 때, 전자교환기 사업을 주장했던 사람입니다.

최근 그의 평전을 읽어보니 그 때문에 오히려 모함받아서 고생했더라고요. 그렇게 어려운 사정에 있다가 청와대에서 뜻을 다시 펼칠 수 있게 된 김 수석은 전자와 통신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줬어요. 박정희 대통령이 중화학 분야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면, 전두환 대통령 시대에는 전자공업육성 정책이 탄력을 받고 통신 혁명이라는 게 시작됐습니다.

당시 우리 팀은 앞장서서 ‘나를 따르라’ 식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을 설득하고 그들과 소통하는 전략을 써왔지요. 일례로 1981년 3월 ‘전자공업육성을 위한 장기정책’을 만들었는데, 당시에 ‘전자산업이란 무엇인가’ ‘반도체란 무엇인가’라는 소책자를 많이 만들어 돌렸어요. 반도체로 만든 문진(文鎭)이나 넥타이핀을 만들어 공무원 사회와 언론에 뿌리면서 홍보활동을 했습니다.”

- 1981년 청와대에서 전기통신사업을 체신부에서 떼어 내 공사화(公社化)하는 것과 데이터통신 사업을 전담할 회사를 설립하는 것 등을 추진하게 됩니다. 전화 사업과 따로 떼어 내 데이터통신 전담회사를 운영한 것은 우리나라가 처음이었습니다.

"체신부 인력 8만명 중 5만명을 떼어 내 전기통신공사를 만드는 밑그림을 그릴 때였습니다. 일본의 경우 NTT(국내 통신)와 KDD(국제 통신) 두 개 회사로 분리시켰어요. 그런데 요금 정산 문제, 접속 표준 문제 등 비효율적인 부분도 한둘이 아녔습니다.

그때는 일본을 벤치마킹하는 것이 당연한 시절이었지만, 두 개 회사가 아니라 한 개 회사로 간다는 것이 내 결론이었습니다. 대신 앞으로 데이터통신이 대단히 중요해지니, 데이터통신 전담 회사를 공사 형태가 아닌 주식회사 형태로 만들자고 했습니다. 데이콤이 시작한 데이터베이스 사업이 바로 ‘천리안’입니다.”

- 그런 구조를 유심히 보면 정보화에 관한 한 한국이 일본을 앞지를 수 있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은 2000년대까지 정보화 계획이 있었고 일관되게 추진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6년 2개월 차관(최장수 차관)을 하고 5공화국, 6공화국 장관을 했기 때문에 최소 8년 동안 한 사람이 장기 계획을 끌고 갔다는 것입니다. 이 계획대로 왔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일본과 달리 혼선을 겪지 않고 발전을 해 올 수 있었습니다. 일본 기자도 그런 평가를 하더군요.

하여튼, KT 설립, 데이콤 설립,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설립, 정보통신정책 연구원 설립, 한국전산원 설립, 통신진흥주식회사, 통신기술주식회사 설립 등 일사불란한 체제로 2000년대까지 갔습니다. 이 과정에 많은 사람을 동참시키고, 남녀노소 정보화 운동을 꾸준히 펼쳐지면서 전체 국민 수준이 높아졌습니다.”

- 아쉬운 점은 있습니까?

“나는 통신은 전문업체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데이콤을 처음 만들 때 어느 그룹도 지분 7% 소유하지 못하게 정관에 넣었어요. 그런데 현재 데이콤은 LG로 넘어갔지요. 이동통신주식회사도 SK 그룹으로 갔습니다. 물론 재벌기업이 가져갔기 때문에 경쟁하면서 그만큼 빨리 성장한 것은 인정해야겠습니다만, 욕심 같았으면 KT나 데이콤이 독자적으로 지금보다 더 큰 회사가 되고 SKT도 전문회사가 되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