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월 생명과학 분야 세계 최고 학술지인 ‘셀(Cell)’지는 장내 세균을 활용한 신약 개발 연구를 표지 논문으로 소개했다.

우리 몸 안에 사는 장내(腸內) 세균이 신약의 보고(寶庫)로 떠올랐다. 몸에 이로운 장내 세균을 주입하거나 이 세균들을 돕고 나쁜 세균은 억제하는 방식으로 당뇨병과 비만, 감염성 질환 등 다양한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것. 바이오벤처 중심으로 진행되던 연구에 글로벌 제약사들의 대규모 투자가 이어지면서 새로운 신약 탄생을 눈앞에 두고 있다.

지난 5월 세계 4위의 제약사인 미국 화이자는 샌프란시스코의 바이오벤처인 세컨드 지노믹스(Second Genomics)사와 손을 잡고 900명의 장내 세균을 분석하는 연구를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지난해에는 세계 1위 제약사인 미국의 존슨앤드존슨이 보스턴의 바이오벤처인 베단타 바이오사이언시스(Vedanta Biosciences)와 장내 세균을 이용한 감염성 장염과 자가면역 질환 치료제 개발을 위한 협약을 맺었다.

사람 몸에는 100조 개가 넘는 장내 세균이 산다. 인체 세포의 10배나 되는 엄청난 수다. 최근 과학자들은 암이나 당뇨, 비만이 몸에 이로운 장내 세균 군집이 붕괴하고 해로운 장내 세균이 득세하면서 발생한다는 증거를 잇달아 찾아냈다. '사이언스'지는 이 같은 연구 결과를 '2013년 10대 과학 뉴스'의 하나로 꼽았다. 자폐증이나 우울증도 장내 세균의 균형이 무너져 일어난다는 주장도 나왔다.

그렇다면 건강한 사람의 대변에서 추출한 장내 세균을 이식하면 살을 빼고 병도 치료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지난해 국제 학술지 '뉴잉글랜드 저널 오브 메디신(NEJM)'에는 클로스트리듐 디피실균(菌)에 의한 치명적 설사병을 대변 장내 세균 이식으로 치료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미 식품의약국(FDA)은 현재 클로스트리듐 감염증에 대해서만 장내 세균 이식을 승인했다. 하지만 인체 대상 임상 시험 결과가 늘어나면 시술 허가는 늘어날 전망이다. 미국 메이요병원의 조셉 머레이 박사는 인체에 이로운 장내 세균을 생쥐에게 주입해 다발성 경화증과 류머티스성 관절염을 치료했다. 연구진은 뉴욕의 바이오벤처인 마이오믹스(Miomics)와 이를 인체에 적용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제약사와 바이오벤처들은 환자에게 불편을 주는 장내 세균 이식을 간편한 알약 복용으로 바꾸려는 시도도 하고 있다. 미국 케임브리지의 세레스 헬스(Seres Health)사와 베단타 사이언시스가 이미 장내 세균 알약을 시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세레스 헬스는 지난해 11월 1050만달러의 투자를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장내 세균 자체보다는 세균이 분비하거나 세균에 작용하는 물질에 초점을 맞추는 회사들도 있다. 미 스탠퍼드대의 저스틴 소넨버그 교수는 항생제 복용 후 시알산이 몸에 축적되면서 이로운 장내 세균이 죽고 나쁜 장내 세균이 득세를 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연구진은 시알산과 비슷한 물질로 이 과정을 차단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미국 콜로라도주의 바이오벤처인 마이크로바이옴 세러퓨틱스(Microbiome Therapeutics)사는 이로운 장내 세균을 돕는 물질이 당뇨병 환자가 인슐린을 더 잘 활용하는 데 도움을 주는지 알아보는 임상 시험을 하고 있다.

장내 세균은 질병 진단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 프랑스 바이오벤처인 엔테롬(Enterome)사는 대변에서 추출한 장내 세균의 유전자를 분석해 질병을 진단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환자들이 꺼리는 대장 내시경을 하지 않고도 간단하게 질병을 진단할 수 있다는 것. 엔테롬은 지난 5월 벤처 캐피털로부터 1000만유로의 투자를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장내 세균이 질병 진단에서 치료에까지 일대 혁신을 가져올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