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 정보화 캠페인 주도

인터넷 20년을 돌아보기 위해 인터넷 관련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2014년 1월 17일 사전 좌담회를 실시했다.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인터넷 보급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인터넷 강국으로 발돋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또 전문가들은 사전 인터뷰에서 언론계가 정보화 캠페인을 공동으로 펼친 점을 여야를 초월한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낸 힘으로 꼽았다.

이에 따라 1995년 조선일보가 제시했던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는 정보화 전략 아이디어의 탄생과 확산 과정을 먼저 취재했다. 또 1997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공동으로 정보화캠페인을 펼쳤던 과정도 취재했다.

안병훈 서재필재단 이사장이 출판사 기파랑 사무실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2014년 5월 9일 오후 3시 안병훈 서재필재단 이사장을 출판사 기파랑 사무실에서 만났다. 서울 동숭동 혜화역 1번 출구에서 나와 골목길을 여러 번 돌고 돈 끝에 기파랑이 입주한 동숭빌딩을 찾을 수 있었다. 5월이었지만, 무더웠다. 기파랑 출판사가 있는 3층 사무실에는 주로 한국 근대사 관련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안 이사장을 찾은 것은 조선일보가 1995년 정보화 운동을 시작하게 된 배경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1995년 3월 5일 조선일보는 창간 75주년을 맞아 다음과 같은 사고를 냈다.

오늘 조선일보 창간 75주년/정보화운동 선언/21세기 정보화포럼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자’라는 구호를 내걸고 정보화 운동의 시작을 선언한다. 지금 우리가 눈을 뜨지 않으면, 그리고 여기에서 선택하지 않으면, 앞으로 오는 세기는 다시 암흑과 침체의 옛 역사를 되풀이 할 지 모른다. 1백년전 우리는 거함대폭에 무릎을 꿇고 나라를 내주었다. (후략)

조선일보 1995년 3월 5일자 1면 캡처

- 1995년 3월 조선일보가 ‘정보화 운동’을 선언하고 정보화 캠페인을 시작합니다. 배경이 궁금합니다.

“내가 조선일보 편집인 시절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편집국장은 인보길씨였습니다. 또 굉장히 앞서 갔던 이진광 기자가 있었습니다. 이 양반들이 정보화 시대가 도래하는 데 가만히 있으면 큰 일이 난다고 강조했습니다.

언론이 바뀌어야 정보화가 가능하다면서 (기자들이) 나를 통해서 허진호씨(아이네트 창업자)라든가, 자기 또래의 정철씨(휴먼컴퓨터 창립자)라든가, 이용태 삼보컴퓨터 회장의 아들 이홍선씨라든가 등 당시 정보기술 분야 앞서 있던 사람들을 방상훈 사장방으로 데려갔습니다. 그 사람들 이야기 들으면서 저도 교육을 받은 셈이었습니다.”

- 정보화 운동을 시작하는 데 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이제 편집국에서 정보화운동을 본격적으로 준비할 때였습니다. 기자들이 미국 기술 전문 전시회인 컴덱스에서 취재를 다녀와서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술 전시회에 가면 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나와 있는 데 공무원은 한 사람도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변화한 세계에 우리나라 공무원의 상태는 무관심하다 정도가 아니라 아예 ‘깡무식쟁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이거 큰일 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사업을 많이 하니까 이 친구들(기자들)이 정보화 포럼을 한번 해보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소위 미래학자들, 과학처 장관 등을 모아 모임을 했습니다.”

1995년 3월 출범한 조선일보 세기 정보화포럼 위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

이상희대표(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위원장)
김진현위원(세계화추진 위원장)
송자위원(연세대 총장)
안병훈위원(조선일보 편집인 겸 전무이사)
유승삼위원(마이크로소프트사 사장)
이상우위원(서강대 교수)
이어령위원(이화여대 석좌교수)
이용태위원(정보산업 연합회 회장)
이헌조위원(LG전자 회장)
조백제위원(한국통신 사장) 가나다순

- 정보화 캠페인의 핵심을 압축한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라는 캐치프레이즈는 어떻게 탄생했습니까.

"이어령 교수는 거의 모든 모임에서 이야기 70~80%를 합니다. 이 교수가 이 모임에서 산업화 시대는 늦어서 우리가 식민지가 됐는데, 또 그렇게 될 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속으로 '이거구나' 했습니다. 그 메시지를 딱 잡았습니다.

조선일보 창간 75주년에 맞춰 이러한 때 나라의 아젠다로 이걸 잡자고 편집국에 이야기했습니다. 정보화 혁명에 조선일보가 걸어야 된다는 분위기였습니다. 내 방에서 논의하고 사장한테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 이걸로 갑니다 보고 했습니다."

- 평소 정보기술에 관심이 많았습니까.

"젊은 기자들의 문제 의식을 열심히 들은 덕분이지 내가 정보기술 전문가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조선일보 정보화 캠페인을 시작하기 오래 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이어령 교수하고 나하고 여러가지 얘기를 하다가 이 교수가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새로운 세상에 새로운 한국인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새로운 변화의 시대는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 지 1면 시리즈로 싣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그 제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대화를 나누다가 우리나라 최초로 워드 프로세서, 그러니까 컴퓨터로 원고를 쳐서 신문사에서 원고를 받는 시도를 한번 해보자고 의기투합했습니다. 그것이 정보화 아이디어를 내는 데 중요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신문 기자들이 펜이나 타자기로 원고를 쓰고 전부 사환(使喚)을 통해 신문사 담당부서에 가져다 주는 시절이었습니다. 내가 편집국장이 되고 그 해(1985년)에 첫 시도를 했습니다. 다른 데선 어떤 지 모르겠지만, 국내 신문사 가운데서는 컴퓨터로 원고를 받아 기사화하는 것이 처음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 정보화 캠페인을 시작하기 전에 정보화 확산을 위한 또 다른 시도가 있었습니까.

"나라의 지도자, 나라의 CEO들이 정보화를 알지 않으면 나라를 앞서게 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국가를 이끄는 CEO는 결국 대통령이고 정부 지도자가 아닙니까.

그래서 김영삼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92년 대통령 후보 시절에 우리가 컴퓨터를 당 사무실에 들고 가면 후보들이 컴퓨터를 치는 것처럼 해서 사진을 찍기도 했습니다. 그 양반들은 정치인들이니까요, 사진을 찍고 정보화 관련 공약을 발표하도록 한 것이지요.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2년 대통령 후보 경선이 붙었을 때 "내가 대통령이 되면 정보통신특별보좌관 같은 자리를 만들겠다"고 공약하기도 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비슷한 공약을 했었습니다."

안병훈 서재필기념회재단 이사장이 출판사 기파랑 사무실에서 인터뷰하는 모습.

- 정보화 캠페인을 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물론, 회사 안에서 반대가 많았습니다. 90년대 초 신문사도 편집국에 컴퓨터를 도입하는 정보화 물결에 휩싸일 때였습니다. 신문사 전산화를 CTS(CTS·Computerized Typesetting System)라고 불렀는데, CTS를 어떤 방식으로 가야 하는가를 두고도 의견이 갈렸습니다.

삼보 이용태 회장과 편집국에서 기술에 밝았던 이남규 논설위원 등은 IBM으로 가면 좋지 않고 컴퓨터와 컴퓨터끼리 간단하게 연결시키는 방법(메인프레임을 도입하는 것 대신 서버-클라이언트 방식을 도입하자는 의미)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결국 IBM방식을 채택했습니다. IBM 방식 지지자들은 정보화 캠페인에 소극적이었습니다.

또 당시에 그 귀한 지면에 ‘컴퓨터를 배웁시다’ ‘영어 배웁시다’ 등 자꾸만 컴퓨터 관련 지면을 만들었습니다. 일반 독자들은 컴퓨터를 잘 모르는 시대에 그런 지면을 만드니, 편집국 안에서 반대가 많았지요.

나는 컴퓨터를 모르고 영어를 몰라 가지고는 세계화 시대에서 앞설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편집국 사람들에게 ‘초등학생때부터 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는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 컴퓨터 아니냐’고 했지요.

회사에서도 이견이 많다 보니, 삼보 이용태 회장 같은 사람을 초청해서 편집국에서 강의도 많이 했습니다. 그 때 이용태 회장이 교육도 컴퓨터로 바뀌어야 하고 심지어 농사일까지도 다 컴퓨터로 해야 하는 세상이 온다고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 언론사는 경쟁이 심한 편인데, 1997년 1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정보화 캠페인 시리즈 10회를 같이 했습니다. 같은 내용을 두 신문사 지면에 동시에 싣는 것은 한국 언론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이 아닌 가 하는 데, 그 과정이 궁금합니다.

“내가 사회부장할 때 체신부 출입기자가 우체국이 저금한 돈을 버스로 실어 날라 도둑 맞기 쉽다는 고발 기사를 써왔습니다. 기자의 문제 의식은 좋은 데 도둑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어 당시 오명 체신부 차관에게 전화를 걸어 특별 수송 차량을 마련하든지 사고를 막을 방책을 마련하라고 얘기했습니다.

당시 오 차관은 언론사는 뭐 있으면 그냥 쓰는 데 쓰지 않고 조언을 해주니 고마워했습니다. 나는 나 대로 그가 전자식교환기 TDX를 국산화한 데 높이 평가하고 있었어요. 또 내가 자전거 운동의 시발자인데, 1993년 오명씨가 대전엑스포 조직위원장을 맡을 때 엑스포에서 관람객이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면 어떨까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오명씨와는 그런 인연이 있는 사이죠. 그후 오명 씨가 동아일보 사장을 맡은 뒤에 어느날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정보화 운동을 공동 캠페인으로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입니다. 나는 오케이를 했고, 사장한테 보고했더니 사장도 오케이를 했습니다.”

조선일보 1997년 1월 9일자 1면 캡처(좌), 조선일보 1996년 5월 2일자 1면 캡처(우)

- 언론사 간 경쟁이 심한 데, 생각보다 쉽게 공동 캠페인이 되었군요.

“그런데 조선일보 편집국 기자들이 공동캠페인을 꺼려했습니다. 우리가 앞서가는 데 왜 경쟁사와 같이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경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국민들을 교육하는 취지의 어젠다를 함께 다루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냐’라고 설득을 했습니다.

공동 캠페인 시리즈 나가기로 한 첫 날이었습니다. 우리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공동 캠페인 기사가 나갔는데, 가판을 보니 동아일보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알고보니 동아일보는 동아일보 대로 난리가 났던 것입니다.

동아일보 기자들이 동아일보가 (조선일보의) 정보화 운동을 왜 쫓아가냐고 했던 것이지요. 그런 우여곡절 끝에 동아일보의 초판에서는 빠지고 시내판(최종판)에서는 기사가 나오는 일화가 있었지요.”

- 1995년 ‘정보화 앞서가자’에 이어 1996년 초등학생에게 인터넷과 컴퓨터를 가르치는 키드넷(KidNet) 운동도 펼쳤습니다.

“그게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는 캠페인을 시작한 후 1년 정도 뒤의 일입니다. 밑으로부터의 정보화를 확산하기 위해서는 초등학교 유치원 학생들을 해야 되겠다는 공감대가 편집국에 있었어요.

내 생각이라기보다는 젊은 기자들이 그렇게 주장했지요. 특히 미시간대 임길진 박사도 어린이에 대한 인터넷 교육 운동 아이디어를 들고와서 키드넷 운동을 펼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런 일이 계기가 돼 우리도 어린이에게 인터넷을 배우게 하자, 키드넷 운동을 그해 3월부터 펼치게 됐습니다.

1996년 5월에 존 게이지(선마이크로시스템즈 창업자중 한명)라는 사람을 초청해 강연을 했었어요. 존 게이지씨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어린이에게 인터넷을 연결시켜주자는 넷데이(Netday)운동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

- 키드넷 운동은 한국의 인터넷 대중화를 앞당기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습니다.

“전국 36개 초등학교와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초등학교를 (인터넷으로) 연결시키는 것을 시도했습니다. 한국과 미국의 초등학생들이 인터넷에서 서로 대화를 하도록 시도한 것입니다. 한미 초등학교 인터넷 자매결연 시범행사를 서울 한양초등학교에서 했습니다.

문제는 당시 초등학교에 인터넷 전용회선은 전혀 없었고 전화밖에 없었습니다. 전화선도 교장실이 하나, 교무실에 하나 등 두 개만 있는 경우가 많았어요. 미국에 인터넷으로 연결하기 위해 전화선 하나를 사용하면 선생들이 아우성을 쳤습니다.

그래서 통신회사 도움을 받아 키드넷 참여학교에 인터넷 전용회선을 설치해줬습니다. 또 영어를 못하는 초등학생들을 위해 대학생 자원봉사자도 붙었습니다.

또 학교에 컴퓨터가 없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래서 컴퓨터 나눠주기 운동을 벌였습니다. 김영삼 대통령도 출신 초등학교(경남 거제)에 컴퓨터 살 돈을 냈어요.”

-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과 마이크로소프트 빌 게이츠 회장이 한국을 찾은 일화도 소개해주십시오.

“손정의 회장은 (삼보와의 인연때문에) 한국에 자주 왔고, 서울에 오면 신문사에도 들렀습니다. 그가 신라호텔인가 롯데호텔인가 강의를 몇 번 한 적이 있는데, 연설을 너무 인상적으로 잘 했습니다.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자신은 한국 사람이면서 일본 사람인데, 일본에서 여론 조사를 하면 3위권 밖으로 떨어진 적이 없을 정도로 인기가 많다. 1981년도 회사를 차렸고 직원도 딱 1명이었는 데 그 다음해에 직원수가 1600명으로 늘어났다. 자신이 개발한 소프트웨어 덕분이다. 각 지점, 예를 들어 부산 지점이나 워싱턴 지점에서 오늘 얼마나 팔았는지 이익이 얼마인지를 서울에 있는 내가 앉아서 한눈에 볼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했고 기업하는 사람들은 이 소프트웨어를 다 필요해서 대박이 났다'는 식이었죠.
1994년에 빌 게이츠가 한국에 왔는 데, 중앙일보와 우리가 취재 경쟁이 붙었습니다. 내가 편집국에 '빌 게이츠 온다고 하니, 뺏기면 너들 죽을 줄 알아라'라고 단단히 일러뒀지요. 당시 한국마이크로소프트 사장이었던 유승삼씨가 고맙게도 (빌 게이츠가) 우리를 선택하는 데 도움을 줬어요. 빌 게이츠가 회사에서 환담하고 연세대에서 강연했는 데 방상훈 사장도 갔었어요."

- ‘정보화는 앞서가자’ 정보화 캠페인의 효과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나는 신문기자 40년했지만, 가장 보람있었던 것이 ‘쓰레기를 줄입시다’라는 구호로 시작한 환경운동을 비롯해 정보화운동,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 등이었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정보화 바다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선구자적인 전길남 박사 등이 있었다고 하지만, 역시 신문의 힘이 컸습니다.

정부가 까막눈이었거든요. 나도 정보화에 뒤늦은 사람이지요. 하지만 언론사가 정보화 운동을 펼칠 수 있었던 데는 보배같은 젊은 기자들 덕분입니다. 그 기자들이 나를 앞세워서 나를 이용을 많이 한 것이죠. 인보길, 이진광, 석종훈, 우병현, 황순현, 임정욱, 권만우 등 다른 기업체보다도 (디지털 흐름에) 앞섰던 기자들이 많았습니다. 조선일보가 디지털에 밝은 젊은 기자들의 소굴이었던 셈이지요. ”

- 정보화 흐름은 언론사가 주도했다고 하는 데, 언론사들은 인터넷 때문에 매출 하락을 겪고 있습니다. 아쉬운 점은 없나요.

“나는 결과적으로 잘 됐다고 보는 데, 회사가 투자를 안 해서 버린 것들이 몇 개 있지요. 이를테면, 오프라인으로 디지털 신문을 냈는 데 중단한 것(국내 최초의 IT섹션 ‘굿모닝 디지털’ 섹션을 의미)을 들 수 있습니다. 또 인터넷 검색에 돈을 들여서 해야 했는데 그런 것을 결정적으로 하지 않았어요.

조선일보는 부수는 감소할 수 있지만, 영향력은 계속 간다고 보고 있어요. 그리고 언론 본연의 임무를 충실히 해야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독자들이 히트수 위주, 흥미 위주를 지양하고 정확한 것을 찾으려고 할 때 꼭 찾는 매체가 되는 게 신문의 살 길이 아닌가 합니다. ”

- 20년 전에는 나라 규모가 지금보다는 작았고 매체수도 적었습니다. 당시에는 언론사가 캠페인을 하면 잘 통하는 시대였지만, 지금은 달라졌을 것 같습니다.

“시대 자체가 그렇게 대(大)군단 용납을 하지 않는 쪽이 아닌가 합니다. 인터넷 시대의 언론 환경의 변화는 누구도 거부할 수 없습니다. 음…. 지금 제 옆 방에 언론학 박사가 계시지만, 그분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떠도는 것을 정규 TV 방송에 그대로 중계하듯이 소개하는 것은 권위 있는 언론이 해야 할 몫이 아니지 않느냐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 의견에 나는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 박근혜 대통령이 미래창조과학부를 만드는 등 과학 입국의 비전을 실현하려고 합니다. 미래창조과학부나 박 대통령의 정보화 리더십은 어떻게 보십니까.

“하하.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정부 부처 명칭을 바꾸는 것이 싫습니다. 예전에 문화교육부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지요. 노동부면 충분한 데 고용노동부로 바꿔야 할까요. 할 때마다 모든 간판 바꿔야 하고 그 모든 서류를 다 버려야 하는 데 정권이 바뀔 때마다 왜 매번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조선일보도 체신부를 전 정보통신부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예전 부처 명으로는 새로운 흐름을 담을 수 없을 때 도리 없이 바꿔야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체신부를 정보통신부로 바꾼 것이 옳았는지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