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가 지난 2008년에 생산된 제네시스 차량을 소유한 김모씨. 김씨는 지난해 12월 자동차 전용도로 2차선에서 시속 80km로 달리던 그는 3차선에서 끼어드는 앞 차량 때문에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하지만 차는 '끼익'하는 굉음과 함께 미끄러져 180도 회전하고 정지했다. 다행히 큰 사고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차체가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절해야 할 'ABS(브레이크 잠김 방지장치)' 기능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서비스센터를 찾은 김씨는 차량의 ABS에 결함이 있었고 리콜 실시 대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김씨는 결함이 있는 차를 타고 고속도로 등을 다닌 기억을 떠올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가상의 사례지만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자동차 회사가 결함이 있는 차량에 대해 리콜 결정이 났음에도 차량 소유주에게 해당 내용을 제대로 알리지 않았던 사실이 밝혀졌다. 국민 편에서 이를 관리감독해야 할 국토교통부 역시 손을 놓고 있었다. 세월호 사태를 불러온 정부의 '안전불감증'을 살펴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사례라는 지적이다.
◆ 형식적 절차에 불과했던 리콜 의무 통지
26일 감사원은 국토교통부 등 2개 기관에 대한 감사 결과를 발표했다. 국토부의 경우 자동차 리콜 부분에서 관리 감독 부실의 문제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일반적으로 자동차 리콜이 결정되면 차량 제조사는 '자동차관리법' 31조 등의 규정에 따라 차량 소유주들에게 해당 내용을 고지해야 한다.
하지만 지난해 10월 현대차는 2007년 12월 24일~2012년 3월 18일 사이에 생산된 제네시스 차량 9100여대의 잠김방지브레이크(ABS) 제어장치 결함내용을 소유주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 ABS에 결함이 발생하면 브레이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현대차가 결함 차량 소유주에게 제대로 리콜 계획을 전달하는지 여부 등을 국토부가 전혀 사후관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난 2012년 3월 리콜을 결정한 현대차의 '엑센트' 950여대(2010년 11월~2011년 5월 생산) 역시 리콜 여부가 차량 소유주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 엑센트는 정면충돌 사고 시 배터리 전기배선 손상으로 전기 합선에 의한 화재가 발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대차는 차량 소유주에게 우편으로 별도로 고지하지 않았다. 국토부 역시 손을 놓고 있었다.
이렇다 보니 결함 차들의 리콜 시정률도 매우 낮았다. 제네시스의 경우 문제 차량 950대 중 24.7%(235대)만 수리를 받았다. 엑센트는 9100여대 중 26.3%(2391대)만 리콜을 했다.
리콜을 실시하면 자동차 제작사는 문제가 된 차량의 문제 부분을 전부 수리해야 한다. 결함 부분을 이미 수리한 소유주에게는 관련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김종훈 한국자동차품질연합 대표는 "리콜이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제조사 입장에서는 적극적으로 차량 소유주에게 알리지 않으려 한다"며 "국토부가 이를 바로 잡아야 하는데 이번 사례를 보면 오히려 제조사의 뒤를 봐준 것 같다"고 말했다.
특히 자동차관리법 시행규칙 제43조는 "제작자는 시정조치가 완료될 때까지 매 분기 종료 후 20일 이내에 국토부 장관에게 진행상황을 보고해야 한다"고 정하고 있다.
김 대표는 "제작사가 국토부에 제대로 보고를 했다면 저조한 리콜 시정률로 인해 국토부가 해당 내용을 모를 수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토부 관계자는 이에 대해 "현대차에서 우편 통지가 늦게 된 사실을 늦게 알았다"며 "최근 다시 우편 통지를 시행해 90% 가까이 수리를 받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 국토부, 리콜 못한다 버티는 제조사 관리 못해
국토부의 관리감독 부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국토부는 2012년 4월 교통안전공단으로부터 크라이슬러의 '그랜드보이저' 차량의 좌석규격이 안전기준에 부적합하다는 조사결과를 받았다. 크라이슬러 역시 조사결과에 이견이 없어 리콜을 하기로 결정됐다.
하지만 크라이슬러 측은 리콜을 하지 못하겠다고 버텼다. 2350만원의 과징금을 납부하고도 결함을 시정하기 곤란하다며 리콜 면제를 요청했다. 그 사이 문제가 된 차량과 같은 차종 8대가 추가로 판매되고 운행되고 있었다.
국토부는 뒤늦게 지난해 4월에서야 리콜을 이행하라는 독촉 공문을 발송했다. 국민 안전을 책임져야 할 국토부는 손을 놓고 지켜보고만 있었던 것. 문제가 된 차량 602대는 올해 3월까지 리콜이 진행되지 않은 채 도로위를 활주했다.
국토부 관계자는 "차량에 폴딩 다운이라는 소비자 편의 사항이 있는데 의자를 넓히면 폴딩이 안되기 때문에 시정 방법을 찾느라 리콜이 늦어졌다"고 해명했다.
◆ 車 사고 피해자 지원할 돈 전용한 국토부
이번 감사원 보고서에서는 리콜 문제 뿐만 아니라 국토부의 기강해이 모습도 드러났다.
국토부는 '자동차손해배상 보장법'에 따라 자동차 사고 사망자나 중증 후유장애인의 유자녀와 피부양가족의 생계유지, 재활 등에 경제적·정서적 지원을 하고 있다. 해당 업무는 국토부가 관리 감독하고 교통안전공단이 위탁받아 운영한다.
관련 예산은 자동차 소유주의 책임보험료의 1%를 분담금으로 징수해 마련하고 있다. 해당 예산은 교통사고 사망자나 중증 후유장애인의 유자녀와 피부양가족의 생계 자금으로만 사용하도록 제한하고 있다. 또 세입과 세출을 별도로 관리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교통안전공단은 이 예산을 '자동차 공제민원 처리 및 관리업무에 관한 협약'에 따라 버스·화물차 등 자동차 공제 민원 처리와 분쟁 조정에 1억49089만원을 사용했다. 해당 내용은 관리 감독의 책임이 있는 국토부의 승인하에 진행됐다.
한 자동차업계 관계자는 "세월호 사태 이후 전 국민이 안전 문제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상황임에도 국토부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국민 안전을 지키기 위한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