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의도에 있는 국민은행 본점 전경.

국민은행 이건호 행장과 정병기 상임감사위원이 은행·카드 전산시스템 교체 건에 대한 이사회 결정 과정에 문제가 있다며 감독기관인 금융감독원에 보고했다. 금감원은 은행 내부통제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판단해 청해진해운 대출 건과 별개로 국민은행에 대한 긴급 검사에 착수했다.

이 행장과 정 감사위원이 국민은행 이사회 결정을 문제삼자 국민은행의 모(母)회사인 KB금융(105560)지주는 "상임감사위원이 (국민은행) 이사회를 무력화 시키려고 한다"고 비판해 KB금융지주와 국민은행, 국민은행 경영진과 은행 이사회 구성원 간 갈등이 증폭되는 양상이다. 이를 두고 임영록 KB금융지주 회장과 이건호 국민은행장간 갈등이라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 국민은행장·감사 "사전 심사자료 부실"…KB지주 "감사권 남용"

20일 금융권에 따르면 국민은행은 작년 하반기부터 전산 시스템을 교체하는 작업을 진행해 왔고 이사회는 지난달 24일 IBM 기반 시스템을 유닉스 시스템으로 교체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대해 이 행장과 국민은행 감사팀은 이사회가 유닉스 시스템으로 결정하는데 참고한 자료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사회가 왜곡된 자료를 기반으로 결정을 내렸기 때문에 다시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금융당국에 따르면 이 행장과 정 감사위원은 이사회 결정 과정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이달 초부터 중순까지 내부 감사를 진행해 왔다. 이 행장과 정 감사위원은 은행 감사위원들이 문제제기를 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감사위원들은 16일 열린 감사위원회에서 이 문제와 관련한 감사를 중단하고 앞으로 안건 보고도 받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 행장은 19일 열린 이사회에 은행장 권한으로 안건을 부의했지만 이사회에서도 감사를 중단하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에 정 감사위원은 해당 내용을 19일 금감원에 보고했고 금감원은 바로 검사에 착수했다. 국민은행 관계자는 "은행의 중요 정보사항은 상임감사위원이 지체 없이 감독당국에 보고하도록 돼 있다"며 "국민은행이 금감원에 특별검사를 요청한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KB금융지주는 정 감사위원이 감사권을 남용해 국민은행 이사회를 무력화 시키려한다고 주장했다. 김재열 KB금융지주 전무는 "국민은행 경영진이 시스템 변경 과정에서 우선협상 대상자 선정에서 탈락했던 IBM코리아 대표의 사적인 이메일을 지난달 14일에 받고 공식절차 없이 재검토를 지시하면서 이번 해프닝이 시작됐다"며 "상임감사위원은 은행 경영협의회와 이사회에서 결의된 사항에 대해 자의적인 감사권을 남용해 최고 의결기구인 이사회를 무력화 시키려고 했다"고 말했다.

◆ "임영록 회장-이건호 행장 갈등 탓" vs "상임감사의 돌출행동"…의견 분분

금융권에서는 이번 사건의 이면에 임영록 KB금융지주 회장과 이건호 행장의 주도권 다툼이 있다고 보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정 감사위원과 국민은행 이사회간 갈등으로 보이지만 정 감사위원은 이 행장을, 국민은행 이사회는 임 회장을 대리한다는 게 금융권 시각이다.

KB금융지주는 이 행장, 정 감사위원이 이사회와 갈등을 보이자 "이사회 의견을 존중해 달라"는 취지를 국민은행 경영진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정 감사위원이 이 행장 지시로 사실상 금감원에 조정을 요청하면서 국민은행이 지주의 요청을 무시한 모습이 됐다. 금융권 관계자는 "이 행장이 임 회장의 도움 없이 행장이 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 아니겠느냐"며 "회장이 행장 선임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다른 지주사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임 회장과 이 행장은 모두 외부 출신이다. 재정경제부 2차관 출신인 임 회장은 KB금융지주 사장을 거쳐 회장으로 선임됐고 금융연구원 출신인 이 행장은 독자적인 지지기반을 바탕으로 행장에 오른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는 이번 사건을 정 감사위원의 돌출행동으로 봐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국민은행이 전산 시스템을 교체하기 위해 작년 7월부터 컨설팅, 경영협의회 등의 절차를 밟아왔는데 IT 비전문가인 감사위원이 갑자기 이 문제를 감사하는 게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에 최근 쇄신안을 발표하며 내부통제를 강화하려는 이 행장이 정 감사위원의 손을 들어주면서 문제가 커졌다는 게 이번 사건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각이다.

정 감사위원은 올 1월 이뤄진 국민은행 정기인사에 대한 감사를 벌이고 올 3월부터는 은행장이 결재하는 모든 서류를 사전에 살펴보겠다고 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감사활동을 열심히 하는 것은 좋지만 조직 내부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비치게 한 것에 대해 (국민은행) 내부에서도 불만이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