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는 작년 11월 증권 애널리스트 대상 행사에서 "앞으로 인수·합병(M&A)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후 6개월간 삼성전자의 M&A 실적은 '제로(0)'다. 같은 기간 페이스북은 190억 달러(약 19조4750억원)에 세계 최대 모바일 메신저 와츠앱을 인수하는 등 6건의 M&A를 성사시켰다. 구글은 무인기 업체 타이탄에어로스페이스 등 21건의 M&A에 성공했다. 글로벌 경쟁자들은 한 달에 한두 번씩 '빅딜'을 선보이며 앞서나가지만, 삼성전자는 여전히 M&A에서는 뒤처진 상황이다.

구글·페이스북, M&A로 새 시장 개척

글로벌 IT기업들이 경쟁적으로 M&A를 추진하는 이유는 새로운 시장에 빠르고 효과적으로 진입하는 데 가장 좋은 수단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성공 사례가 구글이 2005년 모바일 운영체제(OS) 개발업체 안드로이드를 인수한 것. 구글은 창업한 지 2년도 되지 않았던 안드로이드의 잠재력을 꿰뚫어 보고 5000만달러(약 512억원)에 사들였다. 그렇게 인수한 안드로이드는 9년 만에 세계 모바일OS 시장의 80%를 차지하며 구글이 세계 모바일 생태계를 지배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안드로이드 창업자였던 앤디 루빈 구글 수석부사장은 "삼성전자에도 인수 의사를 타진했지만 삼성전자는 '우리는 그 분야에 2000명을 투입하고 있다'며 거절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픽=김현국 기자<br>이미지를 클릭하시면 그래픽 뉴스로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기술 발달 속도가 빠르고 업계 부침(浮沈)이 심한 IT(정보기술) 분야는 특히 M&A가 활발하다. UC버클리 헨리 체스브로(Chesbrough) 교수는 "IT 업계는 자체적인 연구개발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외부와 제휴하거나 M&A를 통해 가치를 극대화하는 개방형 혁신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이렇다 보니 글로벌 IT 기업들은 과감한 M&A를 단행한다. 2010년부터 최근까지 구글은 96건의 M&A를 단행했다. 같은 기간 페이스북은 43건, 애플은 28건의 M&A를 각각 성사시켰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이 기간 지분 투자를 제외한 순수 M&A는 12건에 그쳤고, 액수도 크지 않다. 건수로 따지면 구글의 8분의 1, 애플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장기적 시야, 포용적 기업문화 갖춰야

삼성전자는 현재 이익잉여금으로 154조원을 보유하고 있다. M&A에 나설 '실탄'은 세계 어느 기업 못지않게 든든한 편이다. 그런데도 삼성이 "M&A 유전자(DNA)가 부족하다"는 말을 듣는 것은 비즈니스 스타일과 깊은 관련이 있다. 한 벤처캐피털 대표는 "삼성은 수익이 될지, 안 될지 모르는 시장에 진출하기를 꺼리고 사업성이 입증된 분야에 물량 공세를 퍼부어 판도를 뒤집는 전략을 선호해왔다"고 말했다. 메모리 반도체, 스마트폰, TV 등 삼성이 세계 1위를 달리는 분야가 모두 이런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 전략으로 성공을 거뒀다. M&A도 스타트업(창업 초기 벤처)보다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메디슨·뉴로로지카 등 의료기기 업체를 인수하는 식이었다.

실리콘밸리 기업들은 삼성과 다르다. 구글·페이스북 등은 활발한 M&A를 통해 무인기(드론)·무인자동차·가상현실 기기 등 기존 사업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분야에 도전적으로 진출하고 있다. 기존 사업이 언젠가는 한계에 부닥칠 것으로 보고 미리 신사업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다. 서울대 김상훈 교수(경영학)는 "M&A로 다양한 기술과 플랫폼을 선점해 향후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는 트렌드가 확산되고 있다"며 "지금 하는 사업이 잘 된다고 손 놓고 있다가는 갑작스레 바뀌는 시장 상황을 따라가기 어려울 수도 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에 대형 M&A 사례가 없는 데는 기업 문화와도 관련이 있다. 삼성은 수직적인 의사결정 체계와 일사불란한 기업 문화가 강한 편이다. 세계 최대의 취업 정보 사이트인 글라스도어(glassdoor)에는 삼성전자의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너제이 법인에서 일한 적이 있는 직원들이 "일과 휴가 사이의 균형? 최악이다" "군대처럼 명령에 따라 일한다" 등 삼성전자의 기업 문화를 비판하는 글이 많이 올라와 있다.

M&A 이후 경영 방식도 다르다. 페이스북은 모바일 메신저인 와츠앱을 인수하고도 기존 경영진과 서비스는 독립적으로 운영하기로 했다. 구글이 동영상 업체 유튜브를 인수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1994년 미국 컴퓨터 업체 AST를 인수하면서 경영진의 대부분을 삼성전자 출신으로 물갈이했다. 그러자 AST의 핵심 인재들이 연쇄적으로 회사를 떠났고 M&A는 사실상 실패로 끝났다.

삼성도 새로운 M&A 전략을 시도하고 있다. 과거의 경험과 경쟁사들의 움직임을 분석해 향후 M&A 시장에서 좀 더 활발히 움직이겠다는 것이다. 삼성전자 이상훈 경영지원실장(사장)은 "빠르게 변화하는 시장 상황에 따라 M&A를 추진해 핵심 사업을 성장시키고 신규 시장을 개척할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최근 인수한 미국 실리콘밸리의 음악 서비스 업체 엠스팟에는 재무임원 정도만 파견하고 기존 경영진은 유임시키는 등 변화를 꾀하고 있다. 근무시간을 자유롭게 조절하는 유연근무제, 해외 출장 때 가족 동반 허용 등 기업 문화를 유연하게 바꾸려는 시도도 M&A를 할 때 핵심인재 이탈을 막는 데 도움이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