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낮 A은행 서울 신도림 지점. 은행 일을 보러 지점에 들어가던 주부 김모(60)씨의 시선이 유리문에 붙은 A4용지 위에 선명하게 새겨진 붉은 글자에 멈췄다. '5등급(불량)'. 김씨는 "무슨 내용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내가 20년 넘게 거래한 은행이 불량이라고 하니 찝찝하다"고 말했다.

금융당국으로부터 소비자 보호가 미흡하다고 판정을 받은 은행·보험·증권 등 17개 금융사 3000여개 지점이 지난 12일부터 지점 입구에 '불량'이라고 적힌 붉은 딱지를 붙이고 영업을 하고 있다. 해당 금융회사는 국민·농협·한국SC은행, 롯데·신한카드, 알리안츠·에이스·우리아비바·ING·PCA 생명보험, 롯데·ACE·AIG 손해보험, 동부·동양증권, 친애·현대저축은행 등이다. 이들은 금융감독원이 시행하는 금융회사 민원발생 평가에서 최하등급(5등급)을 받은 금융사들이며, 금감원의 지시에 따라 그 내용을 공지한 것이다.

15일 서울 시내의 한 은행 지점 출입구에 이 은행이 소비자 보호와 관련해 최하 등급(불량) 판정을 받았음을 공지하는 문서가 붙어 있다. 금감원이 금융회사들에 평가 결과를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게시하도록 지시한 데 따른 것이다.

민원발생평가는 금감원이 각 금융사별 민원 건수와 처리 건수, 금융사고 유무 등을 종합해 등급을 매기는 것으로, 같은 업종의 비슷한 규모의 타사에 비해 고객 민원이 상대적으로 많을수록 나쁜 등급을 받게 된다. 이 평가는 올해가 처음은 아니다. 지난 2006년부터 시행하면서 각 금융사별로 결과를 웹사이트에 공개하도록 했었다. 그런데 낮은 등급을 받은 금융사들이 최대한 보이지 않는 곳에 조그맣게 올렸다가 슬그머니 내리는 등 '꼼수'를 쓰자 금감원이 이번에 작심하고 칼을 빼들고 나선 것이다. 'A4 용지에 폰트 크기 55, 빨간색 글자로 인쇄해 영업점 출입구에 3개월간 게시하라'는 식으로 못박았다.

그러잖아도 각종 악재에 시달리고 있는 금융 회사들은 하루아침에 '불량 금융사'인 것처럼 낙인까지 찍혔다며 불만스러운 기색이 역력하다. 반면 금감원은 "소비자의 선택권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라며 '네임 앤 셰임'(name & shame·이름을 밝히고 망신주기) 전략을 강화하겠다는 입장이 확고하다.

금융회사 지점 3000곳에 '불량 딱지' 붙어

고객 정보 유출 등으로 민원이 급증해 '불량' 등급을 받은 한 은행 본점 관계자는 "원죄(原罪)가 있으니 금감원 평가를 받아들이고 개선하려고 노력하겠다"면서도 "(망신주기 방침을) 사전에 알았다면 무언가 조치를 취했을 텐데 갑자기 지침이 내려와 당황스럽다"고 말했다. 이 은행은 "이 평가 결과는 민원에 국한된 것이지 은행 자체가 5등급은 아니라는 점을 고객들에게 잘 설명하라"는 지침을 각 영업점에 내려 보냈다. 고객들의 질문과 항의에 시달리게 된 영업점의 분위기는 더 싸늘하다. B은행 지점 직원은 "신뢰 회복을 위해 직원들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 와중에 빨간 딱지가 붙는 바람에 직원들의 사기 저하는 물론 영업에도 큰 지장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보험업계에서는 민원 건수를 기준으로 등급을 매기는 방식이 블랙 컨슈머(악성 소비자)를 부추길 수 있다는 불만이 나온다. 한 보험업계 관계자는 "무리하게 보험금을 타내거나 보험 사기를 치려는 사람들이 마지막에 하는 말이 '금감원에 민원하겠다'는 것"이라며 "이렇게 가혹하게 등급을 매긴다면 보험사들이 블랙 컨슈머에게 굴복해 보험금을 지급하고 마는 경우가 더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 금융사들은 민원 건수가 적은 지방 금융사와 대형사를 같은 잣대로 평가하면 불리한 등급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항변한다. 규모가 작은 금융사들 사이에서는 "민원이 조금만 늘어도 등급 변동이 심하다"고 볼멘소리가 나온다.

금융회사 "너무한다" vs 금융당국 "소비자 보호를 위한 것"

이번 '주홍글씨' 사태는 금융사들이 자초한 측면이 있다. 이번 평가에서 낮은 등급을 받은 금융사 대부분이 전에도 낮은 등급을 받고도 그다지 개선하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농협은 지난 2011년과 2012년에도 최하 등급을 받았고, 국민은행은 2011년 3등급, 2012년 4등급을 받았다. ING생명, PCA생명, 알리안츠생명, AIG손해보험, 에이스손해보험 등 5개사는 5년 연속 5등급을 받았다. 금감원은 이 5개사에 대해서는 등급 공개에 그치지 않고 현장 실사에 나서기로 했다.

등급 공개를 강화하겠다는 금감원의 방침도 이미 예고돼 있었다. 지난해 금감원은
2012년 평가 결과를 발표하면서 '네임 앤 셰임' 효과를 극대화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천명했다. 금감원 관계자는 "금융사들로부터 '너무 과한 것 아니냐'는 불만이 나오는 것은 알고 있지만, 투명한 정보 공개를 통해 소비자의 선택권을 보장하기 위한 당연한 조치"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