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의도 증권가 photo 오종찬 조선일보 기자

한 증권사의 투자전략팀장은 유망한 투자 종목 발굴 대신, 증권업계 판도 변화를 연구한다고 했다. 그는 “당장 나의 밥줄과 미래가 달린 일이니 어쩔 수 없다”며 “최근 불황에 빠진 국내 증권업계가 인수·합병을 거쳐 일본처럼 대형 증권사 한두 개만 남고 나머지 군소 업체들이 난립하는 형태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이 투자전략팀장의 걱정엔 다 이유가 있다. 최근 공개된 국내 증권사 직원 수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지난 4월 28일 금융투자업계와 기업 정보 사이트 재벌닷컴에 따르면 국내 주요 25개 증권사의 직원 수는 지난해 말 현재 3만2225명으로 2008년(3만1534명) 이후 최저를 기록했다. 2012년 대비 8% 감소했다. 증권사 수익이 감소하면서 인력 구조조정이 이뤄진 결과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62개 증권사의 당기순손실은 1100억원으로 2002년 이후 11년 만에 적자를 냈다.

구조조정안이 나온 증권사에선 직원들끼리 눈치 보기가 한창이다. 한 증권사 이모 부장은 “예전 같았으면 퇴직금을 받고 잠시 쉬다가 다른 증권사로 이직하면 됐지만 이제는 나가면 갈 데가 없다”며 “차에 붙은 젖은 낙엽처럼 현재 회사에서 버티는 게 최선이다”고 말했다. 동료의 퇴직금을 대상으로 하는 영업이 펼쳐지고 있다는 씁쓸한 소리까지 들린다. 한 증권사 팀장은 “혹한기를 거치고 있다”며 “문제는 이 추위가 언제 풀릴지 끝이 보이지 않다는 데 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삼성증권 김석 사장은 지난 4월 11일 사내 방송을 통해 “회사 존립이 위협받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면서 ‘초강도 구조조정’을 발표했다. 임원 6명(20%)을 줄이고, 3년차 이상 직원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받겠다는 것이다. 희망퇴직 규모는 밝히지 않았지만 전체 직원 2700여명 중 300~500명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98개인 점포 역시 20% 정도 줄인다는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삼성증권의 당기순이익은 지난해 4월부터 12월까지 240억원에 그쳐 전년 동기 대비 절반 수준을 기록했다.

여기에 삼성그룹 임직원들이 그룹 차원에서 자산을 많이 맡겼는데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미운털이 박혔다는 소문도 돈다. 삼성증권이 자문형 랩(자문사 조언을 바탕으로 증권사가 증권을 매매해주는 서비스)과 브라질 채권 등에서 판판이 수익률을 깨먹었다는 것이다. 삼성증권의 한 직원은 “같은 사무실 안에서 명예퇴직 신청 동료들과 함께 근무하고 있으려니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리투자증권을 인수한 NH농협금융지주가 NH농협증권과의 합병 과정에서 우리투자증권 직원 1000여명을 감원(減員)할 것이란 소문도 나온다. 우리투자증권 측은 "전체 직원이 3000여명인데 3분의 1을 자른다는 건 어불성설이다"라며 반발하고 있다. 노조는 지난 4월 17일 "10년 이상 근속자를 대상으로 명예퇴직 신청을 받기로 했다는 농협의 구조조정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파업을 결의했다.

하나대투증권은 지난 4월 24일까지 부부장급 이상의 경우 3년 이상 근속자, 차장급 이하의 경우 7년 이상 근속자를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접수했다. 특별퇴직금은 근속연수에 따라 최소 10개월에서 최고 24개월치 임금으로 책정된다. 인원은 확정되지 않았지만 일각에서는 최소 150~200명 정도가 감축될 것이라는 얘기가 돌고 있다.

요즘 증권가에선 "향후 테마주는 치킨 업종이 될 것이다"는 자조 섞인 유머들이 나돈다. 구조조정 당한 증권맨들이 무더기로 프랜차이즈 치킨집을 차리게 될 거라는 예상에서다.

불경기는 여의도의 풍속도를 바꾸고 있다. 공간을 놀리지 않으려는 여의도 술집들은 점심시간에 옆 식당에 자리를 임대해 주고 있다. 술집에서 된장찌개와 회덮밥 같은 식사를 하는 증권맨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한 증권사의 강모 과장은 "일반 식당처럼 북적이지 않아서 좋지만 불황 때문에 생긴 현상이어서 씁쓸하다"고 말했다. 어떤 술집은 아침 일찍 출근하는 증권맨들에게 점심시간 방을 수면실로 빌려주기도 한다. 이곳에선 점심때마다 직장인들이 긴 소파에 드러누워 곯아떨어진다. 여의도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김모씨는 "증권맨들이 퇴근하면 바로 귀가하거나 대부분 1차에서 약속을 마치는 통에 요즘 여의도 밤 풍경은 썰렁하다"고 말했다.

증권사들은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생존경쟁을 벌이고 있다. 수익이 급감하는 상황에서 고객 한 명이라도 더 끌어모으기 위해 선착순 현금 경품까지 내걸면서 호객을 한다. 현대증권은 지난해 자사 모바일 거래 시스템으로 한 차례 이상 거래하면 통신비 등 지원금 20만원을 지급했고, 올 들어선 수수료가 붙는 해외 증시 시세 서비스를 신청한 고객에겐 3만~5만원의 상품권을 지급하고 있다. 한국투자증권은 지난해 온라인·모바일 거래 시스템 신규 고객 중 추첨을 통해 매수한 주식과 동일한 주식을 한 주씩 선물로 줬고, 올해엔 다른 증권사에서 옮겨 온 고객에게 최대 13만원의 현금을 지급하고 있다. 삼성증권도 자사 온라인이나 모바일 시스템으로 금융상품 거래를 시작한 고객 중 선착순 1000명에게 1만원씩 경품을 주는 행사를 벌이고 있다.

이런 식으로 증권사의 출혈경쟁이 심해지자 증권사 수익성을 걱정하는 애널리스트 리포트도 등장했다. 장효선 삼성증권 연구원은 '무료 이벤트 이제는 멈춰야 할 때'라는 보고서를 내고 "이제는 경제 분석 리포트까지 무료로 제공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증권사는 왜 가수나 작곡가처럼 적극적으로 본인의 저작권을 주장하지 못하고 그런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는지 의문"이라며 "이런 비이성적 경쟁은 손실로 귀결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증권사들이 고전하는 데엔 박스권에 갇힌 주가도 한몫한다. 오르든지 내리든지 주가가 한 방향으로 움직여야 그에 따른 수수료 수입을 올릴 텐데 3년여 동안 코스피는 1900~2100의 박스 구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펀드 시장이 급속히 위축되면서 투자자들이 증시를 떠났고, 지난해 북핵 사태에 미국 양적완화 축소 불안감으로 개인투자자들의 심리가 위축됐기 때문이다. 여기에 동양증권의 기업어음 불완전 판매, 한맥증권의 파산 위기 등 대형 사건들은 증시의 성장동력을 약화시켰다.

그 결과 주요 20개 증권사의 수수료 수입은 상반기(3월 결산법인 4~9월) 기준으로 2009년 2조2773억원에서 지난해 1조1514억원으로 반토막 났다. 한 증권사 부장은 "'인터넷 혁명' 같은 새로운 차원의 혁신이 일어나지 않는 한 증시가 도약할 모멘텀(성장동력)이 보이지 않는다"며 "현재로선 통일만이 증시가 기대할 만한 대박 이벤트"라고 말했다.

하지만 일각에선 이번 위기를 기회로 삼을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1998년 IMF 외환위기 이후 국내 은행들이 혹독한 구조조정을 거쳐 경쟁력을 회복하고 좋은 직장이 됐듯이 증권사들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기회라는 뜻이다. 한 증권사 이사는 "몇 년간 여러 차례 증권사 구조조정 얘기가 나왔지만 그때마다 주가가 오르는 바람에 흐지부지됐었다"며 "아프겠지만 이번엔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통해 증권 업계가 한 단계 성장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증권사들이 지난해 최악의 해를 보냈지만, 올해는 점차 나아질 거라는 희망적 관측도 나온다. 김학균 KDB대우증권 투자전략팀장은 "미국 등 선진국 경제와 증시가 살아나면서 올해 한국 증시도 한층 활기가 돌 것"이라고 예상했다.

[- 더 많은 기사는 5월 5일 발매된 주간조선 2305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