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영광의 원전 한빛3호기.

국내 원자력발전을 책임지는 한국수력원자력은 지난 18일 발칵 뒤집혔다. 원전비리 구조 척결이라는 임무를 갖고 한수원에 부임한 조석 사장이 발탁한 이청구 부사장에게 뇌물 수수 혐의로 구속영장이 발부됐기 때문이다. 청렴하다는 내부 평판을 발판삼아 부사장에 오른 이 부사장은 월성원자력본부에서 근무한 2009∼2010년 원전업체로부터 부품 납품 청탁과 함께 1000여만원을 받아 챙긴 혐의를 받았다.

이 부사장의 구속 사건은 원전 비리 문제가 얼마나 뿌리깊은지를 잘 보여준다. 지난 2월말 현재 원전비리와 관련돼 기소된 피고인은 200명에 육박하는 데, 이중 상당수가 전·현직 한수원 직원인 것으로 파악된다. 한수원 4,5대 사장을 지난 김종신 전 사장부터 말단 실무진까지 거의 모든 직급의 직원들이 금품수수 등에 연루돼 사법처리 대상이 됐다. 원자력발전을 둘러싼 비리구조가 조직적으로 형성돼 있다는 얘기다. 이를 ‘원자력 마피아’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들 원전 마피아들은 원전 부품 발주, 성능평가, 계약, 검수 등 부품 조달 전 과정에 걸쳐 금품을 상납받는 방식으로 비리를 공모했다. ▲부품 시험성적서 위조 ▲납품계약 관련 청탁, 알선 ▲인사청탁 ▲납품가격 담합 등 비리 유형도 다양하다. 원전 비리 수사팀의 한 관계자는 “말단에서 금품을 수령에 최고위층까지 나눠먹은 상납구조는 마피아들의 방식과 흡사했다”고 말했다.

◆ 원전 마피아 ‘숙주’는 학연···고위직은 ‘원자력 전공자’·실무급은 ‘특정 고교’

원전 마피아들의 비리문제는 지난해 5월 신고리 원전 1,2호기와 신월성 1호기가 가동을 멈추면서 불거졌다. 원전에 시험성적서가 위조된 부품이 사용됐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비리·상납구조가 백일하에 드러났다. 정부가 가동중지 3기와 건설 중인 5기의 원전을 대상으로 전수조사한 결과 총 2010건의 시험성적 조작 등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가동중인 20기의 원전에서 277건의 서류 조작이 확인됐다. 지난해 사상 최악의 전력난은 비리로 인한 인재(人災)였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이로 인한 경제적 피해액도 9조원이 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원자력 발전 업계의 유착관계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원전 마피아는 퇴직한 공직자들이 산하기관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비리와 부정을 저지르는 일반적인 관료 마피아와는 다르다. 원자력 발전이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분야라는 점이 오히려 이들을 마피아로 만든 출발점이었다.

원자력 관련 공학과가 설치된 서울대(원자핵공학과), 한양대(원자력공학과) 등을 중심으로 한 학맥이 원전 마피아들의 주요 숙주로 지목된다. 이들 대학 원자력공학과 출신들이 한국전력과 한수원 등에서 원전 관련 정책의 빼대를 만든다는 점이 이같은 마피아 구조를 만들었다.

원자력 정책을 관장하는 산업통상자원부 공무원들도 원자력 지식 등 전문성이 떨어져 견제력을 행사하지 못할 정도다. 이 때문에 원전 발전사업자에 부품을 납품하거나 발전소 건설에 입찰하는 민간사업자들은 이들과 네트워크를 맺기 위해 원자력 전공자들을 채용한다. 몇몇 대학 원자력 관련과 출신들이 원전업계에 ‘그들만의 리그’를 구축하게 된 배경이다. 이들은 일상적인 향응과 골프접대, 금품수수 등을 통해 한수원과 한전의 원전 관련 사업부서의 인사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영진과 간부뿐만 아니다. 원자력 관련 조직의 중하위 실무진들도 학연을 기반으로 마피아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한수원 감사실 보고서에 따르면, 2011년부터 지난해 9월까지 원전 비리로 기소된 한수원 임직원 53명 중 14명(26.3%)이 한국전력이 고졸 직원을 채용하기 위해 설립, 운영하고 있는 S공고 출신인 것으로 나타났다. S공고 출신들은 한전과 한수원의 발전 사업 현장 실무에 진출한다. 고교 때부터 형성해 온 끈끈한 인맥은 비리구조 일상화된 주요 배경으로 손 꼽힌다.

◆ “전공 학위 및 전문 지식을 장벽삼아 기득권 재생산 하는 구조”

역대 한수원 발전본부장 재직자 명단

이같은 원자력 관련 전공자들의 독주는 2001년 창립 이후 재직한 한수원 임원들의 학력 분포 등에서 잘 드러난다. 창립 이후 재임한 총 30명의 임원(사장 포함·상임 감사 제외)중 원자력공학과 출신은 총 8명에 이른다. 서울대 원자력공학과 출신인 이중재 전 사장은 한수원 사업본부장과 3대 사장을 거친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은 특히 원자력발전 부문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한수원의 원자력 발전 부문을 책임지는 발전본부장은 지난 14년동안 총 10명이 재직했었는데 이중 5명이 서울대나 한양대에서 원자력을 전공했다. 이번에 구속 기소된 이청구 부사장도 한양대 원자력공학과 출신이다.

원자력 공학과 출신 한수원 임원들은 상당수가 퇴직 후에도 유관기관에 재취업했다. 한수원 사업본부장 출신 민계홍씨는 한국방사선폐기물관리공단 이사장을 거쳐 한국 원자력산업회의 상근 부회장으로 재직 중이다. 한수원 발전본부장 출신 송명재씨도 지난 2011년 퇴임 후 한국방사성폐기물관리공단(현 한국원자력환경공단) 이사장을 연임했다.

원전비리 사태가 터진 후 한수원에서 퇴직한 임직원들은 2년 안에 원전 관련업체에 재취업하는 것이 금지됐다. 하지만 이런 규제도 시간이 흐르면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업계의 우려다.

이같은 행태에 대해 전문가들은 특정한 분야의 전문성을 방패막이 삼아 자신들의 기득권을 확대 재생산하는 행위라고 꼬집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국내에 원자력 관련 전공 개설 대학이 극소수라는 환경 때문에 원전 마피아 논란과 같은 독점 폐해가 나타난 측면이 있다”면서도 “한수원의 주요 핵심 기능에 일부 원전 관련 전공자 및 전문가들이 너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원전 마피아로 인한 카르텔을 깨기 위해서는 한수원 독점체제를 깨야 한다는 지적을 내놓고 있다. 조직 분리 등을 통해 경쟁체제를 도입해야 특정 분야의 전문성과 학맥 등에 의존한 기득권의 대물림이 일어날 여지가 적어진다는 것이다.

한수원이 최근들어 삼성 출신 손병복 한울원자력본부장을 영입하는 등 대외 개방성을 확대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지만, 뿌리 깊은 비리구조를 깨는 데에는 역부족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한 에너지업계 관계자는 “원자력 발전이라는 울타리를 거대한 장벽 삼아 기득권을 유지해온 원전 마피아들의 독식구조를 깨기 위해서는 정권 차원의 추진력이 필요하다”면서 “원전 정책에 관해서는 산업관료들도 한수원 등의 원전 마피아들에게 의존했었기 때문에 개혁 메스를 대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