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텔레콤과 한국수력원자력 뇌물 사건은 미국 법무부가 해외부패방지법(FCPA)에 의거, 조사에 착수할 요건이 충분하다. 두 사건은 국내에선 경미하게 처리됐지만, 미국 법무부는 FCPA에 의거해 해당 국가 사법처리 결과와 별개로 사건을 처리한다." – 대형 법무법인 소속 최모 변호사

조선비즈가 김앤장, 광장, 태평양, 화우 등 대형 법률회사 소속 변호사 6인과 함께 국내 대기업의 뇌물 사건을 분석한 결과, 2011년 불거진 SK텔레콤 직원 로비, 한수원 전 사장의 금품공여 등 뇌물수수 사건이 FCPA에 저촉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 SK텔레콤, 최대 600억원까지 벌금 물어낼 수 있어

SK텔레콤은 2011년 1월 우정사업본부 '차세대 기반망 구축사업'을 따내기 위해 평가위원에게 금품을 제공한 사건에 연루됐다. 당시 검찰은 SK텔레콤 박모(49) 국방사업추진단장을 불구속 기소했다. 박씨는 2010년 7월 20일 이 사업의 기술점수 평가위원을 만나 "잘 평가해달라"는 청탁과 함께 호텔 디너쇼 관람권 등 모두 63만원어치 금품을 건넸다.

미국 정부는 FCPA 관련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 FCPA 가이드 첫 페이지는 전세계 지도가 배경으로 쓰였다


검찰은 SK텔레콤이 회사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임직원에게 형사 책임을 묻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 법무부는 FCPA에 의거 SK텔레콤에 고액의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다. 회사가 뇌물 사건에 조직적으로 관여하지 않아도 주의·감독 의무에 소홀했다고 판단되면 미국 법무부는 해당 기업을 처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뇌물이 전달되지 않았더라도 뇌물을 주겠다는 의사만 표시해도 처벌을 피할 수 없다.

FCPA 벌금은 범죄 수익의 2배까지 부과된다. 당시 우정사업본부의 사업 규모는 317억원이었다. 이 탓에 SK텔레콤은 최대 634억원까지 벌금을 부과받을 수 있다.

SK텔레콤 관계자는 "당시 전달된 호텔 디너쇼 관람권 6장 중 4장은 이미 유효기간이 지나 금전적 가치가 작다"고 말했다. FCPA는 뇌물 액수와 상관없다. 금품이 아무리 작아도 뇌물이라고 판단되면 처벌을 피할 수 없다.

◆ ADR 발행 기업, 1차 타깃

국내 대기업이 미국 뉴욕증권거래소에서 자사 주식을 거래하기 위해 미국주식예탁증서(ADR)를 발행했다면 FCPA에 저촉되지 않는지 주의해야 한다. ADR은 미국 뉴욕증권시장에서 발행·유통되는 미국 달러 표시 기명식 주식예탁증서다. 미국 회계기준에 맞춰 미국 시장에서만 발행되며 미국증권거래위원회의 규제와 감독을 받는다. 비(非) 미국계 기업이 자사 주식(원주)의 거래 없이도 주식 유통을 할 수 있는 장치다. 원주의 소유권을 표시하고 있기 때문에 원주 자체를 움직이지 않고서도 미국에서 주식을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다.


국내 기업으로는 SK텔레콤, 한국전력, KT, 우리금융지주, KB금융지주 등 15개 회사가 ADR을 발행했다. 비록 국내 업체이지만 주식이 미국 증권시장에서 거래된다는 이유로 자국 기업과 거의 동일한 기준으로 FCPA 적용을 받는다.

◆ "한국 기업들, FCPA에 취약"

FCPA 전문 변호사들은 한국 대기업이 FCPA에 특히 취약하다고 진단한다. 그룹이 주요 계열사의 경영 의사결정을 하는 경우가 많은 탓이다. FCPA 규정은 자회사 뇌물수수 사건을 모회사가 공동 책임지게 한다. 국내 대기업집단은 순환출자구조로 묶여진 탓에 1개 계열사가 FCPA 규정을 위반하면 여러 관계회사가 엮여 들어갈 수 있다.

최명석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는 "모 회사가 자회사 지분 50% 이상을 갖고 있으면 모 회사가 자회사 뇌물 사건에 대해 함께 책임져야 하는 것으로 FCPA는 규정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논란이 된 한국수력원자력 원전비리와 관련 한국전력도 FCPA 조사를 받을 수 있다. 한국전력 역시 SK텔레콤처럼 ADR 발행 회사다. 한수원 지분 100%를 가지고 있으므로 한수원의 부패 행위를 책임져야 할 위치에 있다. 김종신 전 한수원 사장은 2010년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에게 한수원에 유리한 정책을 부탁하며 700만원을 제공한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뇌물 금액을 회계 처리할 때 회계분식이 동원될 수밖에 없다. '뇌물'이라는 계정과목은 없기 때문이다. FCPA는 특히 회계분식 행위를 엄벌한다. 뇌물수수 사건은 금품 공여로 끝나지 않고 분식회계 처벌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왼쪽)과 김종신 전 한수원 사장.

◆ 국내 은행 도쿄지점 비리, FCPA 불똥 튈 수도

KB국민은행 도쿄지점 부당대출 사고 역시 FCPA 적용을 받을 수 있다. FCPA에는 '뇌물방지규정' 외에도 '회계규정'을 따로 두고 있다. 국내 외부감사에 대한 법률(외감법)과 유사하다. 미국 증시에 상장된 기업의 공시 신뢰성을 높이기 위한 규정인데 ADR 발행기업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국민은행 도쿄지점 부실대출 사고는 FCPA 회계규정에 저촉될 가능성이 크다. 한 법무법인 변호사는 "부실대출이 이뤄졌다면 도쿄지점 재무제표의 신뢰성은 훼손됐다고 봐야 하므로 FCPA 회계규정을 피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정교화 김앤장 변호사는 특정 기업이 아닌 일반론을 전제로 "FCPA 규정에 의하면 뇌물 죄보다 분식회계 규정이 더 엄격하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