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일 아카데미 시상식장에서 유명 배우들이 셀파이를 찍고 있다.

올해 초 옥스퍼드사전이 발표한 ‘2013년 최고의 신조어’를 본 한국인들은 고개를 갸우뚱했을 법하다. 옥스퍼드사전은 2013년 최고의 신조어로 ‘Selfies(셀파이)’를 꼽았다.

셀파이? 이게 뭔지 궁금해하다가 ‘스스로 찍는 사진. 보통 스마트폰이나 웹캠을 통해 찍으며 소셜미디어나 웹사이트에 올린다’는 설명을 본 순간 피식 웃은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한국인에게는 유행이 지나도 한참은 지났을 ‘셀카’를 난데없이 최고의 신조어로 올린 옥스퍼드사전이 뒷북을 친다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이같은 생각은 미국에서 요즘 벌어지는 ‘셀파이의 진화’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 내려진 성급한 판단일 뿐이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지난 3월 2일 할리우드에서 촬영된 셀파이를 한번 보자. 이날 아카데미 시상식 사회를 보던 코미디언이자 배우인 엘런 드제너러스가 찍은 셀파이가 대박을 쳤다.

드제너러스의 셀파이에는 메릴 스트립, 제니퍼 로렌스, 브래드 피트, 안젤리나 졸리, 케빈 스페이시, 브래들리 쿠퍼 등 정상급 배우 10명의 얼굴이 담기며 2006년 탄생한 트위터 역사에 기록을 만들어냈다. 촬영 직후 하루 만에 전부 330만의 리트윗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이전 최고 기록인, 2012년 재선 직후 오바마 대통령 부부가 포옹하는 장면의 사진 리트윗 77만건에 비해 4배 정도 많다. 이날 리트윗이 폭주하면서 트위터 서버가 잠시 고장을 일으킬 정도였다.

‘셀파이+10’으로 명명된 할리우드발 사진을 보면서 필자는 진화해가는 팝문화를 감지할 수 있었다. 10명이나 되는 배우를 셀파이에 집어넣는다는 발상 자체가 새롭게 와닿았다. 이날 셀파이에 담긴 10명은 보통 인물들이 아니다. 수십 수백 명의 카메라맨과 파파라치가 달라붙는 스타들이다. 과장하자면, 다빈치 그림 10점이 모두 한군데 모여 있다고나 할까? 모바일폰 카메라 렌즈 속의 이들 ‘셀파이+10’은 원래 혼자 있어도 빛나는 대스타들이다.

그것도 대스타를 위한 전문 사진사가 찍은 사진도 아니었다. 사진을 보면 알지만 ‘셀파이+10’의 구성원 모두가 눈을 뜨고 사진을 찍었다는 사실도 놀랍게 느껴졌다. 단 한 번 촬영으로, 전부 눈을 뜬 10명을 포착해내기는 극히 어렵다. 모두가 셀파이에 익숙한 듯하다.

진화하는 셀파이 문화는 오스카 수상식 3주 뒤 다시 맹위를 떨친다. 이번에는 ‘셀파이+13’으로 확대됐다. TV 나이트 토크쇼 사회자 지미 킴멜이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뿌렸다. 이 셀파이에는 빌 클린턴 전 대통령 부부와 딸 첼시, 대학생 등 13명의 얼굴이 담겨 있다. 애리조나주 템페에 있는, ‘클린턴 글로벌 이니셔티브 대학(www.cgiu.org)’의 활동과 관련해 킴멜이 클린턴 가족과 대화를 나눈 뒤 찍었다.

‘셀파이+13’을 면밀히 살펴보자. 셀파이의 구도를 보면 킴멜이 중간을 차지하고 전면에 클린턴 가족이 자리 잡고 있다. 곧 대통령 출마를 공식 선언할 힐러리가 왼쪽, 남편인 클린턴 전 대통령이 오른쪽, 그리고 가까운 시일 내에 정치에 데뷔할 것이 유력시되는 첼시가 아버지 옆에 서 있다. 이 셀파이에 담긴 힐러리의 얼굴은 필자가 본 최근 사진 중 가장 아름답고 원숙하다. 포토샵을 했는지, 주름살이 하나도 안 보인다.

TV 나이트 토크쇼 사회자 지미 킴멜(가운데)이 클린턴 전 대통령 가족과 찍은 셀파이.

이 셀파이가 갖는 정치적 함의는 사진 속 클린턴 가족의 배후에 있다. 배경으로 서 있는 대학생들의 면면이 흑인, 아시아인, 백인 등으로 다채롭다. 현재 미국의 모습이자, 민주당이 꿈꾸는 이상적인 사회이다. ‘지체 높으신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젊은 대학생들과 어울려 거리낌 없이 셀파이를 찍는 인물이 클린턴 가족이라는 점을 은근히 강조한다.

사진을 본 사람이라면, 세계 최고의 거물 정치인조차 보통 사람들처럼 셀파이를 즐긴다는 사실에 감동할 것이다. 그냥 막 찍은 듯한 셀파이지만, 정치적 의도가 배어 있는 고단수의 홍보용 사진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오스카 수상식장의 ‘셀파이+10’, 클린턴가의 ‘셀파이+13’은 이제 막 탄생한 ‘셀파이 2.0’의 하이라이트라 볼 수 있다. 2014년 옥스퍼드사전의 신조어로 떠오를지도 모르지만, 한두 명의 얼굴이 등장하는 게 아니라 십여 명씩 떼로 등장하는 ‘집단 셀파이’를 정의하는 용어는 아직 없다. 특히 남에게 사진 찍히는 데 익숙한 유명 연예인이나 정치가, 기업인, 운동선수 등이 등장하는 집단 셀파이가 왜 유행하는지에 관한 논의도 아직 없다.

신종 유행처럼 번지는 집단 셀파이에는 교황도 참여했다. 지난해 8월 30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바티칸을 찾은 500여명의 10대 순례단을 만난 자리에서 4명의 10대들과 함께 환한 얼굴로 셀파이를 찍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동성애자를 응원하고 마피아와의 전쟁도 불사하는 대중 친화도가 높은 인물이다. 10대들의 문화인 집단 셀파이를 전혀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는 모습이 신선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집단 셀파이로 구설에 올랐다. 지난해 12월 10일 남아공에서 열린 넬슨 만델라 장례식에서 오른쪽에 앉아 있던 헬레 토르닝 슈미트 덴마크 수상,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등과 함께 이른바 ‘장례식 셀파이(Funeral Selfie)’를 찍어 화제를 뿌렸다.

미국은 사진의 역사에서 셀파이를 처음 선보인 나라다. 1839년, 사진사인 로버트 코르네리우스(Robert Cornelius)가 주인공이다. 그는 셔터를 누른 뒤 렌즈 앞으로 달려가 스스로의 모습을 앵글 속에 담았다. 개인주의를 앞세우는 미국에서 나 홀로 셀파이가 아닌 집단 셀파이가 유행한다는 사실은 뭔가 이상하다고 느껴진다.

그 이유는 SNS에서 찾을 수 있다. 사람과 사람을 하나로 실시간으로 연결해주는 SNS가 일상화되는 과정에서 셀파이가 집단 셀파이로 변해가고 있다. 나 혼자만을 위한 셀파이가 아니라, 집단 속의 셀파이다. 혼자 만족하는 나의 모습이 아니라, 모두에게 인정받기 위한 나이다.

지나친 경쟁과 적자생존은 요즘 미국 교육 현장에서 터부시되는 원칙 중 하나다. 뛰어난 머리나 재주를 가진 개인보다, 집단 속에서 원만히 어울리면서 전체의 능력을 향상시켜 주는 리더가 중시된다. 열심히 공부하면서 하버드대학에 들어간 수많은 한국 학생들이 미국의 주류에 끼어들기 어려운 이유는 ‘집단 속의 개인’에 약하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 교육의 기본 이데올로기 중 하나가 ‘함께 나누는 것’이다. 미국이란 나라가 원래부터 멜팅포트(Melting Pot)이기는 하지만, ‘모두 함께’라는 슬로건이 사회 곳곳에서 강조되고 있다.

필자의 친척인 7살 여자 어린이의 예지만, 아이폰으로 셀파이를 찍을 때 특별한 주문을 ‘결코’ 빠뜨리지 않는다. 절대 혼자가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 ‘함께’ 찍을 것을 요구한다. 전혀 모르는 사람일수록 더 좋아한다. 셀파이에 이어 2013년 신조어로 펠파이(Felfies)라는 말도 탄생했다. 동물과 함께 사진을 찍는, 농부 이미지의 셀파이를 의미한다. 집단 셀파이와 일맥상통하지만 환경, 동물애호, 그린(Green)이란 21세기 이데올로기가 펠파이에 투영돼 있다.

한국의 셀카는 개개인이 얼마나 아름답고 특별한지를 확인하는 과정의 부산물이다. 각도에 맞춰 가장 아름답거나 애교가 깃든 사진을 찍고, 자신의 몸매 가운데 가장 자신 있는 부분을 찍어 모두에게 보낸다. 나르시시즘(Narcissism)에 젖은 셀파이다. 셀파이에 담기는 대상은 얼굴만이 아니다. 이미 IT 신조어로 정착된, 레그시스(Legsies·늘씬한 각선미에 주목하는 셀파이), 벨파이(Belfie·자신의 엉덩이 곡선을 보여주는 셀파이) 같은 말들을 떠올리면 된다.

백악관에서 찍은 오바마와의 셀파이가 삼성전자의 모바일폰 선전에 이용되고 있다는 게 논란을 빚으며 백악관 내에서 아예 셀파이를 금지할 것이란 보도가 나오고 있지만, 이미 유행처럼 번지는 셀파이 붐을 막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에도 기존 셀카를 넘어서는 ‘셀파이+10, +20, +30’ 같은 셀카의 진화가 이뤄질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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