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이더가 될 수 있었던 건 우연과 필연이 더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원래 1996년 동양증권에서 코스피 선물ㆍ옵션 시스템을 개발했는데, 2년뒤쯤 담당했던 직원들이 모두 퇴직하면서 제가 그 시스템을 전담하게 된 거죠. 당시 초창기다 보니 시스템에 장애도 많았고 민원도 폭주하던 때였습니다. 대뜸 육두문자로 시작하는 전화도 많았죠. 저도 정말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 뒤로 모든 것을 치밀하게 작업했습니다. 당시 대부분 수작업으로 하던 것을 프로그램으로 짜서 나름대로 완전 '전산화'를 꾀한 거죠. 그러다 내가 만든 '로직'으로 직접 트레이딩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현대선물 김학규 부장

여의도 현대선물에서 만난 김학규 부장(48)은 업계에서 장수하는 일명 '1세대 트레이더'다. 고려대 수학과 85학번 출신인 김 부장은 원래 작은 벤처회사에서 근무하다 늦은 나이에 트레이더업계에 뛰어들었다. 국내 파생상품 시장이 생소하던 1990년대 후반에 트레이딩을 시작해 지금까지 개인 투자자로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얼굴에는 여유가 넘쳤다.

김 부장은 시스템 트레이딩을 전문으로 한다. 기술적 지표를 이용해 기계적으로 매매하는 방식이다. 극초단타매매(HFT·고주파매매)라고도 한다. 그는 선물 가격 움직임에 따라 해당 옵션의 매매와 체결시 청산과 손절매가 자동으로 수행되도록 짜인 일명 '선물 추종 매매' 로직을 따른다. 시장 상황에 따라 미세하게 로직을 바꿔주며 매매를 지속하고 있다.

"사실 어릴 때부터 전산에 관심이 있진 않았습니다. 1985년 대학교 입학 후 운 좋게 멘토가 되어준 선배한테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했죠. 당시 1980년대만 해도 컴퓨터 자체가 일반 사람들한테 많이 보급되지 않았던 때입니다. 그러다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 복학을 했는데, 제 컴퓨터의 아래아 한글 프로그램이 바이러스에 걸렸더군요. 그때부터 컴퓨터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컴퓨터로 코딩하는데, 그게 컴퓨터 모니터 화면으로 보이는 게 신기하더라고요. 저도 모르게 컴퓨터에 푹 빠졌습니다."

컴퓨터에 매력을 느낀 김 부장은 작은 전산 관련 벤처 업체에 취직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사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도 금융 쪽에 취업하고 싶어 원서를 냈는데 당시에는 수줍음도 많이 타고 말도 어눌해서 면접에서 떨어졌다"고 털어놨다. 당시 입사한 첫 직장에서는 주로 대기업으로부터 개발 프로그램을 의뢰받아 기업에 일정기간 파견을 나가 일을 했다. 그는 "그래도 당시 여러 대기업에서 상당히 고급 기술을 요하는 업무까지 두루 거치면서 실력을 갖추게 됐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업계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고 1996년 중순쯤 이직을 결심했다. 김 부장은 "사실 실무는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을 만큼 자신이 있었는데, 여전히 그때도 말을 잘 못해서 최종 면접에서 떨어지기도 했다"면서 "동양그룹 면접에서도 사장 면접때 떨어졌는데, 실무진의 강력한 추천으로 결국 입사하게 됐다"고 웃었다.

현대선물 김학규 부장

그는 동양그룹의 IT서비스 관련 업무를 전담하는 동양시스템즈에서 근무하게 됐다. 그러다 당시 동양증권에서 대대적인 홈트레이딩시스템(HTS) 개편 작업을 하던 1998년쯤 트레이더길로 빠지게 됐다. 그는 "당시 내가 모든 프로그램을 나름대로 전산화하면서 시스템을 안정화시켰다"면서 "2000년대부터는 트레이더들을 위한 편의 프로그램도 본격적으로 개발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트레이딩에서 가장 중요한 '빠른 속도'와 '간편한 주문' 방식의 프로그램 등을 개발했다.

"다양한 프로그램을 짜주면서 저도 많은 트레이더들을 만나게 됐습니다. 그 전에 트레이더라고 하면 진입 장벽도 놓고 뭔가 특권층으로만 알았었죠. 그런데 업무를 같이하다 보니 그들도 저와 별 차이가 없다는 걸 느꼈습니다. 제가 시장을 분석하고 프로그램을 짜주다 보니 저도 직접 매매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김 부장은 "사실 그 당시 내 옆에 앉아 있는 트레이더들이 고액의 연봉을 받는 것을 보고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끼기도 했다"고 솔직히 답했다. 그는 "아이디어만 있으면 짧은 프로그램의 경우 2~3일이면 짤 수 있다"면서 "그래서 매매에 더 자신감이 붙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2003년 3월, 단순한 아이디어로 로직을 짜서 본격적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렸고, 매매를 시작했다. 다행히 첫 달 수익이 좋았다.

그러다 2004년 1월, 김 부장은 본격적으로 선물ㆍ옵션팀으로 옮겼다. 30대 후반의 적지 않은 나이 때였다. 그는 "뒤늦게 트레이딩을 시작한다는 부담감이 가장 컸고 내 로직에 대한 확신도 적었지만, 다행히 초반에 수익이 꾸준히 늘었다"고 웃었다. 첫해에만 수수료를 떼고 130억원을 벌었다.

현대선물 김학규 부장

"하지만 위기도 있었죠. 2005년 11월 11일이었습니다. 단 1분 만에 8000만원 이상의 손실을 봤죠. 그때 전산 매매의 치명적인 단점을 온몸으로 체험했습니다. 원래 지수가 급락할 때는 숏 포지션이 모두 체결되는데, 순간적으로 지수가 급등할 때 기계가 수행한 차익 실현과 손절 주문이 모두 체결이 안 됐던 겁니다. 미체결 잔량이 순식간에 쌓였죠. 모두 손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가 전산 매매를 시작하고 나서 2년 정도 된 때였죠. 그때 본부장의 호출을 받고 회사에 소문도 쫙 났었습니다."

그 뒤로도 고비는 꾸준히 닥쳤다. 2007년 7월, 무디스가 우리나라의 신용등급을 한단계 상향 조정한 날이었다. 김 부장은 "그때도 하루에 4000만원 이상을 손실을 봤다"면서 "장이 과열권이라고 판단해서 고점에서 매도로 물타기를 하다 결국 손실 한도를 넘어 모두 손절하게 됐다"고 털어놨다. 그는 전산 매매는 기본적으로 크게 손실을 보진 않지만, 전산 매매만 믿고 임의적으로 매매하는 것은 경험상 실패 확률이 높았다고 강조했다.

전산 매매는 '전산 오류'라는 치명적인 위험도 도사리고 있다. 그는 "실제로 2010년에 코스피 선물 주문이 1계약씩 1만번 가까이 실행되면서 선물이 2p 정도 오른 적이 있다"면서 "프로그램에서는 한 번만 주문이 나가도록 했는데, 잘못 기입해서 주문이 반복 실행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런 오류를 한번 저지르면 그 트레이더는 바로 시장에서 쫓겨나기 마련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

이후 그는 2007년 4월 동양선물로 회사를 옮겼다. 트레이딩은 속도가 중요한데, 아무래도 동양선물은 자체적으로 종로구와 여의도의 전화국을 거치면 됐기 때문에 매매에 유리했다고 한다. 그는 "그전보다 전화국 한곳을 거치지 않는 작은 차이로 1.5배~2배의 수익률을 더 거두게 됐다"고 설명했다. 요즘엔 시장이 거의 '1000분의 1초' 싸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2008년 10월, 본격 전업 투자자로 전환했다. 내 돈으로 충분히 증거금을 내고도 수익률을 낼 수 있다는 확신이 들던 때였다. 그는 "개인 투자자로 전향하면 일상생활에 여유가 많을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면서 "오히려 나 자신을 통제하고 규칙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파생상품 시장의 치열한 속도 경쟁에 대해서도 거듭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그는 "아무래도 한국거래소의 파생상품 본사가 지금 부산에 있어 매매 속도 면에서 경쟁자들에게 뒤쳐진다"면서 "매매 주문을 내면 부산을 찍고 서울로 오니까 부산에 거점을 둔 세력들에게 질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그는 "거래소가 부산이든 서울이든 한 곳에 통합되면 좋겠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