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는 ‘돈’을 이용한 로비가 합법이다. 주로 대형 법률회사(로펌)가 기업의 로비 업무를 대행한다. 삼성전자 미국 법인은 로펌 ‘에이킨 검프’를 고용해 미국 상·하원과 행정부처를 상대로 로비를 벌인다. 반면 국내에서 로비 활동은 훨씬 은밀하게 이뤄진다. 조선비즈는 입법부·행정부·사법부 상대로 로비 업무를 수행하는 기업 대관(對官) 담당자들을 만나 한국형 로비스트의 일상을 들여다봤다.[편집자주]

대기업 대관 부서의 업무는 입법부·행정부·사법부 동향을 파악하고, 비즈니스에 유리하게 정책을 유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인맥을 총동원한다. 대관 담당자들의 활동은 때론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타고 넘는다.

#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 관계자 3명, 야당 국회의원 보좌관 3명, 기자 3명이 지난해 초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정식집 ‘용수산’에 모였다. 술자리를 겸한 이날 저녁식사에는 SK그룹과 현대자동차관계자 4명도 ‘스폰서(식대 계산)’로 참여했다. 1인당 15만원꼴, 총 200만원 안팎의 식대는 금감원이 3분의 1을 내고, SK와 현대차가 각각 3분의 1씩 부담했다. 이날 참석한 SK·현대차 관계자는 대관 업무 담당자였다. 이들은 서로 구면인듯 농담을 주고 받으며 술자리의 흥을 돋웠다. 술자리는 이들의 일터며 업무의 연장선이다.

# 대기업 대외협력부서 장모 부장은 오전 6시 요란한 알람 소리에 잠을 깼다. 전날 모 국회의원 보좌관과의 술자리는 새벽 1시까지 이어졌다. 장씨는 숙취를 달랠 여유조차 없다. 지난주 공정거래위원회가 제출하라고 요청한 자료를 일과 중에 전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주를 겸한 점심 약속은 오후 2시를 넘기기 일쑤다. 오전에 최대한 자료 검토를 끝내야 점심식사 뒤 자료를 넘겨줄 수 있다. 자료 제출이 끝나면 저녁에는 또 다른 국회의원실 ‘식구들’과 약속이 잡혀있다.

대관 담당자를 바라보는 시선은 두가지다. 우선 국내에선 로비가 불법이다보니 대관 업무를 한국 실정에 맞게 변화한 로비스트로 본다. 반면 대관 담당자는 스스로 정부와 기업간 ‘소통 채널(통로)’이라고 자부한다. 실제 현장에서 만난 대관 담당자들은 국회, 정부 부처, 언론, 협회·단체 등지를 들락거리며 불법과 합법의 경계선 상에서 아슬아슬하게 기업의 이익을 관철해 갔다.

◆ 명목상 업무는 기업 창구

국내 대기업 대다수는 대관 조직을 거느리고 있다. 10대 그룹과 주요 계열사들은 수십명에 이르는 방대한 조직을 꾸린다. 삼성전자(005930)는 ‘업무팀’이라 불리는 대관 조직을 운영한다. 현대자동차 역시 삼성에 맞먹는 대관팀이 활동하고 있다. LG전자(066570)의 경우 대외협력담당 상무가 대관 조직을 이끈다. SK(034730)그룹과 KT(030200)조직 내에서는 CR(Corporate Relation·대관)팀이 대관 업무를 담당한다. 20대 그룹 이하 주요 계열사도 다수의 대관 담당자를 두고 있다.

대관 담당자의 출신은 다양하다. 삼성과 LG의 경우 내부 직원이 승진해 대관 임원이 된다. SK와 KT는 행정부처 공무원을 대관 담당 임원으로 영입하기도 한다. SK플래닛처럼 국회의원 보좌관 출신을 대관 담당자로 ‘모셔’오는 사례도 늘고 있다.

대관 담당자의 명목상 업무는 기업과 입법부·행정부·사법부 간 소통 통로다. 정부나 국회가 사업 관련 규제나 정책을 만들 때 정보를 제공하거나 기업 입장을 전달한다. 정책 입안자가 사업 관련 전문 지식이 필요하면 기업 실무 담당자와 만남을 주선한다. 대기업 대관담당 임원은 “1~2년마다 보직이 바뀌는 행정부 공무원이나 4년 임기 국회의원보다 시장 상황에 대한 정보는 기업이 한수 위”라며 “입법부나 행정부 정책 담당자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 제대로 된 정책이 나오게끔 돕는 게 우리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안테나’ 세우기는 일상의 업무다. 안테나는 국회 상임위 의원실이나 정부 부처 등에 인맥을 구축한다는 뜻의 은어다. 대관 담당자는 기업 경영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안테나를 세운다. 혈연, 학연, 지연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하지만 안테나 세우기는 대관 담당자의 부수 업무일 뿐이다.

술자리는 대관 업무 담당자들의 일터다. 평소에 다양한 인맥을 구축해놓아야 정보교류가 용이해지고 정책에 기업의 이익을 반영할 수 있다.

◆ 책상보다 식탁 위에서 일하는 그들

대관 담당자에게 가장 중요한 업무는 따로 있다. 바로 정책 수립과 입법 과정에 비공식적으로 개입해 자사 이익을 반영하는 것이다. 총수의 소환이나 처벌을 막고 기업 이익을 해치는 규제조처를 없애거나 기업에 유리한 경쟁환경을 조성할 법안의 국회 통과를 유도한다. 이런 업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대관 담당자의 어두운 면이 드러난다.

조선비즈가 만난 대관 담당자들의 주 업무는 ‘책상’ 위에서 보다 ‘식탁’ 위에서 이뤄졌다. 가장 중요한 업무 역량은 인맥과 친화력이다. 특정 정책을 관철하거나 좌절시킬 목적으로 음성적 금품이 오가는 정황도 포착했다. 다만 과거처럼 직접 현금 다발을 싸가지고 가는 경우는 드물었다.

대신 유대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 동원됐다. 기업이 국회의원 지역구에 사회공헌활동을 지원하거나 로비 대상자의 자녀를 대기업 정규직으로 취업시키기도 했다. 외부에 누설될 위험이 적고 로비 대상자와 훨씬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게 장점이다.

과거 대기업 대관 담당자들의 로비 수단은 금품과 골프 접대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더욱 은밀한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지난해 국회 국정감사 직전, 한 상임위에서 모 IT(정보기술) 업체 대표의 증인 채택을 추진했다. 곧장 업체 대관 담당자가 의원실로 달려왔다. 그는 국감 증인을 대표에서 한 직급 아래 임원으로 낮춰 달라고 요청했다. 대신 국회의원 지역구에 주민들이 사용할 수 있는 수십억원짜리 복지시설을 지어주겠다고 제안했다. 해당 IT 업체 대관 담당자는 “국회는 보는 눈이 많아서 직접 돈을 싸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대신 지역구에서 의원이 생색낼 수 있게 도와주는 게 요즘 추세”라고 말했다.

◆ 로비스트 법제화의 ‘명과 암’

국회 입법조사처에 따르면 변호사법 111조와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제3조(알선수재죄)는 변호사든 아니든 대가를 받는 로비 활동를 불법으로 규정한다.

형법은 국회의원에 대한 기부행위는 조건 없이 이뤄져야 한다고 규정한다. 대가성이 있으면 불법이다. 로비는 대가성이 분명한 만큼 위법성을 벗기 어렵다. 이 밖에 정치자금법은 로비 활동 일환의 정치자금 기부를 금지하고 있다.

부산저축은행의 로비스트로 활동한 박태규씨가 2011년 구속돼 서초구 대검찰청을 나서고 있는 모습. 우리나라는 로비스트들이 각종 게이트에 연루되면서 부정적 인식이 강하다.

이와 달리 미국은 1946년 ‘연방로비활동규제법’과 1995년 ‘로비공개법(Lobbying Disclosure Act)’을 입법화해 로비를 양지로 끌어냈다. 삼성전자가 미국에서 벌이는 로비 활동과 자금을 매년 공개할 수 있는 것도 이 법 덕분이다.

국내서도 법무부가 2007년 로비 양성화를 추진한 적이 있다. 로비 양성화 찬성론자는 로비활동을 법제화하면 금품 및 향응이 동원되는 불법 로비가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로비 양성화가 시민, 영세 기업, 단체에게는 불리하다며 반대하는 목소리도 작지 않다. 2007년 로비스트 도입을 내용으로 한 ‘청원대리인에 관한 법률(가칭)’이 무산된 것도 이 때문이다.

한 국회의원 보좌관은 “음성적인 로비는 쉽게 부패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며 “대관업무 수행과정에서도 드러나지 않는 온갖 편법이 동원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미국처럼 로비를 합법화하고 로비 자금의 성격을 명확히 하면 음성적인 거래가 줄어들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