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1월 우리나라가 CDMA(코드분할다중접속) 방식의 디지털 이동통신 서비스를 세계 최초로 상용화한 것은 일대 사건이었다. CDMA가 상용화되기 전까지 313만명이던 휴대전화 가입자는 3년 뒤인 1999년 2100만명으로 급증했다. CDMA 휴대폰 개발도 날개를 달았다. 그 모든 것이 개발 초창기에는 모험이었다. 상용화를 완료해야 하는 시한만 정해져 있었을 뿐 어느 것 하나 갖추어진 것은 없었다.
"당시 CDMA는 실험실에서만 성공한 기술이었어요. 실제 서비스가 가능할지는 아무도 장담 못 했죠. 그래도 성공만 하면 '대박'이 터진다는 믿음이 있었어요. 그때 우리 사회 분위기는 정말 진취적이었어요."
당시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에서 CDMA 개발부장을 맡았던 이주식 엠엔서비스 사장은 "무선 분야에선 아무것도 없는 나라에서 '한번 해보자'는 분위기가 바로 성장 동력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SK텔레콤의 자회사인 엠엔서비스에서 OK캐시백 서비스와 B2B(기업 간 거래) 마케팅 등을 지휘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SK텔레콤의 CDMA 상용화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이동통신 시대를 열어갈 수 있었다. 그는 서정욱 당시 사장 등 CDMA 기술 개발을 주도했던 사람들에겐 '자신감'이 있었다고 했다. 기술자들은 우리 손으로 전자식 유선전화 교환기(TDX)를 만든 경험이 있었다. 정부의 지원도 힘이 됐고, 민간 기업들의 협조도 적극적이었다. 무엇보다 500여명의 연구원이 한마음으로 똘똘 뭉쳐 일궈낸 성과였다. 이 사장은 지금도 1995년 기자들과 함께 서울 남산 하얏트호텔에서 삼성동 코엑스까지 이동하며 CDMA 기술로 끊김 없는 이동전화 시험 통화에 성공했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전날에 마지막 테스트를 했어요. 저녁 8시부터 다음 날 새벽 2시까지 꼬박 6시간을 길바닥에 있었죠. 고장 난 이동통신 기지국을 밤새워 고치고, 그게 죽으면 또 살리고…."
고난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이후 1995년 12월까지도 기지국이 안정화되지 않아 통화가 자주 끊겼다. 애가 탔다. 상용화 D데이를 일주일 남겨두고선 미국에서 들여온 휴대폰 3000대가 작동되지 않는 사고까지 발생했다. 북미 지역과 한국의 통신 표준이 달라서 통화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미국 기술진까지 불러 크리스마스 이브 휴가도 반납한 채 수(手)작업으로 일일이 소프트웨어를 수정한 끝에 상용화에 성공했다.
이 사장은 "CDMA 기술은 휴대폰의 통신 칩만 퀄컴 것을 썼고, 나머지 시스템을 구성하는 교환기·제어국·기지국·단말기는 모두 우리가 개발한 것"이라며 "이 기술이 없었다면 우리가 세계 최초로 LTE(4세대 이동통신) 기술을 상용화할 수도, 삼성전자가 해외로 나갈 수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 따르면 1996년부터 2001년 사이 6년간 CDMA 기술 개발을 통한 생산 유발 효과는 125조원, 부가가치 유발 효과는 65조원에 이른다. 삼성전자·LG전자 등 CDMA 개발에 참여했던 기업들은 당시에 쌓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국내외 시장에서 입지를 확대할 수 있었다. 반면, CDMA를 외면했던 노키아나 모토롤라는 결국 회사가 다른 곳에 인수되는 운명을 맞았다. 퀄컴 칩을 쓰지 않으려다 보니 기술 개발이 늦었고, 이것은 몇 십 년 뒤 회사의 운명을 갈랐다는 것. 이 사장은 "속도를 중요시하는 이동통신 비즈니스에서 순간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한눈에 보여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