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5일 오후 5시, 서울 광화문 KT사옥 1층의 '올레스퀘어'가 북적이기 시작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신사부터 백팩(backpack)을 둘러멘 더벅머리 학생, 짧은 원피스를 차려입은 여대생까지. 도통 종잡을 수 없는 300여명의 무리가 한데 모였다. 이 모임은 고영하(高永夏·62) 한국엔젤투자협회 회장이 매월 마지막주 화요일에 주최하는 '고벤처포럼'이다. 참가비는 무료. 참석 조건은 단 하나다. '스타트업(창업 초기 기업·startup)에 관심이 있을 것.'

한 달에 한 번 4시간 동안 예비 창업자에게 필요한 각종 정보 제공부터 명함 교환, 사업 소개 기회, 벤처캐피탈 임원의 멘토링을 한꺼번에 진행한다. 딱히 홍보도 크게 하지 않았지만 소문이 나, 매달 인터넷으로 사전 참가 신청을 받을 때마다 선착순 300명 정원을 넘어 대기자만 150~200여명에 달한다.

수백명이 북적거리는 '무료' 모임은 늘어지기 마련이지만, 이곳의 분위기는 칼 같았다. 이날 모두 19명이 무대 위에 올랐고, 동시에 옆에선 초시계가 돌아갔다. 주어진 시간에서 단 1초라도 넘기면 사회자가 "네 감사합니다"라며 말을 끊고, 곧바로 마이크를 뺏는다.

지난 25일 오후 서울 광화문 KT 사옥의 올레스퀘어에서 열린 국내 스타트업 모임 ‘고벤처포럼’에 스타트업에 관심 있는 300여명이 참석해 ‘사물인터넷’에 대한 강연을 듣고 있다.

오후 5시 15분. LG경제연구원의 신동형 연구원이 무대 위로 뛰어 올라와 '사물인터넷'을 주제로 강연을 시작했다. 순간 강연장 곳곳의 사람들이 모두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스마트폰으로 강연자에게 질문을 하기 위해서였다. 벽면에 붙어 있는 인터넷 주소(goven.clbnow.com/#ask)에 접속하면, 곧바로 질문을 남길 수 있다. "사물인터넷에 대한 개념이 아직 안 잡혀요." "지금까지 써본 웨어러블 기기 중 가장 좋았던 게 뭐예요." 청중의 추천 수가 많은 질문부터 강연자가 하나씩 답하는 식이다.

기계적인 교류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강연장을 빼곡히 채운 300여명 모두에겐 10초간 마이크가 주어지는 '10초 자기소개' 시간이 있다. 10초간 숨 가쁘게 앱 소개를 쏟아내는 개발자부터 서른 전에 창업하는 것이 목표라는 대학생, 청년창업을 소재로 프로그램을 준비한다는 방송작가, 수업 듣는 학생들을 우르르 데리고 왔다는 대학교수, 반짝이는 스타트업을 찾으러 왔다는 대기업 직원 등 다양한 면면의 사람들이 자기소개를 했다. 마이크가 강연장을 한 바퀴 도는 데 40분이 걸렸다.

실리콘밸리 통신원, 앱 통계 전문가, 변리사 등도 무대에 올라 스타트업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글로벌 벤처 업계 동향, 법률상식 등을 딱 '5분씩' 간결하게 전해주고 내려갔다.

고벤처포럼은 2007년 11월 첫 모임을 가진 이래 올해로 7년째를 맞는 국내 최장수 스타트업 모임이다. 업계에선 "예비 창업자를 위한 국내 대표 스타트업 모임(임정욱 스타트업얼라이언스 센터장)" "스타트업 하는 사람치고 안 거쳐 간 사람이 없을 만큼 유용하고 가장 활성화된 곳(김봉진 우아한형제들 대표)"이라고 평한다.

고영하 회장은 "벤처 업계 사람들끼리만 알고 있는 노하우나 정보를 젊은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 처음에 7명 데리고 밥 사주면서 시작한 것이 여기까지 왔다"고 말했다.

연세대 의대 출신인 그는 정치권에 잠시 발을 들였다가 2002년 '셀런TV'를 공동 창업했다. 그 회사를 하나로텔레콤에 매각, 이후 SK브로드밴드미디어 회장을 역임했다. 퇴임 이후엔 초기 스타트업에게 자금을 투자하고 노하우를 전수하는 이들의 모임인 한국엔젤투자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모임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순서인 '5분 스피치·멘토링'. 사업을 갓 시작한 스타트업 대표가 5분간 자신의 아이디어를 소개하고, 벤처캐피탈 임원 6명 앞에서 냉철한 평가를 받는 시간이다. "대기업이 뛰어들면 어떻게 할 겁니까"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은데 왜 지금 출시했죠"와 같은 날카로운 질문이 이어졌다.

행사가 끝날 무렵 고 회장이 무대에 올랐다. "이런 발표 과정을 통해서 실패를 줄일 수 있습니다. 무대에 오르고 싶은 사람은 언제든 저한테 연락을 주세요. 많은 사람을 만나봐야 합니다. 많은 걸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누구를 아느냐도 중요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