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X그룹에 대한 구조조정이 한창이던 작년 5월 홍기택 산은금융지주 회장은 한국에 주재하는 한 주요국 대사와 만나야 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대형 정유사가 STX조선해양에 발주한 탱커선 12척을 예정대로 2015년까지 넘겨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했다.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의 검토 결과는 어처구니없었다. 이 계약은 7700억원에 수주했지만, 계약대로 탱커선을 만들어 인도할 경우 2800억원을 손해 보게 돼 있었다. 수주를 취소하고 위약금 1000억원을 그냥 물어주는 것이 나을 정도였다. 강덕수 전 STX그룹 회장은 그룹이 침몰하기 직전 이같은 저가(低價) 수주를 남발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채권단 관계자는 "수천억원의 손실 위험이 뻔한데도 이런 계약을 일사천리로 체결한 데는 '내 회사니 내가 마음대로 한다'는 강 회장의 독단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오너의 눈앞 이익을 챙기기 위해 기업의 실적 악화나 국가적인 손해 등은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는 지적이다. 강 전 회장은 현재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국내 재벌 문제 가운데 하나는 독단적인 '황제 경영'이다. 주주, 직원, 고객 등의 이익을 함께 추구하는 게 아니라 '쥐꼬리 지분을 가진 오너가의 이익'만을 추구한다는 비판이다. 그동안 우리 경제 성장의 큰 역할을 해온 스피드한 의사결정 등의 장점은 살리되 독단으로 치닫는 황제 경영의 폐해는 견제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강력한 리더십과 황제 경영을 구분하자는 것이다.

◇글로벌 기업조차 사(私)조직처럼 만든 황제 경영

"광고 대행회사부터 구내매점, 임원 차량 렌터카 회사까지 회장과 관련설이 파다합니다."

얼마 전 한 중견그룹 A임원은 이렇게 말했다. 이 그룹은 종업원만 2000여명에다 '글로벌 경영'을 외치는 그룹이다. 하지만 회사 곳곳의 업무에 '회장'의 이름을 파는 일이 흔하다. 각종 신규 사업이나 투자 관련 보고서를 쓸 때 첫 번째 기준은 '회장의 의중'이란 게 공공연한 비밀이다. A임원은 "'회장'이 원하는 대로 보고서를 쓰지 않으면 곧바로 인사상 불이익을 바로 받는다는 게 실제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20일 수원 지방법원은 독일계 엘리베이터 업체인 쉰들러가 현대엘리베이터를 상대로 낸 '신주 발행 무효 청구 소송'에 대한 판결문에서 ▲현대엘리베이터가 금융회사들과 현대상선 주식을 기초자산으로 한 파생상품계약을 맺은 이유가 오너의 그룹 경영권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 ▲이로 인해 2008년부터 5년 동안 현대엘리베이터에서 1063억원의 거래 손실과 3812억원의 평가 손실이 발생한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신주 발행의 유효성을 따지는 소송에서는 현대 측이 이겼지만, 판결문에는 현대 측 오너의 경영상 '전횡'에 대해서는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다.

◇황제 경영을 막을 장치들 보완해야

학계에서는 이같은 현상을 놓고 '신(新)대리인 비용'이란 얘기까지 나온다. 기업의 주체(주주와 채권자)가 대리인(경영인)을 둘 때 대리인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어 발생한다는 '대리인 비용'이, 쥐꼬리 지분을 가진 오너들이 경영을 독단적으로 하면서 기존 주주와 직원들의 이익을 손상시키는 '대리인 비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얘기다. 대주주 문제를 오랫동안 연구해 미국 하버드대 베브척(Bebchuck) 교수는 "기업 집단(재벌)의 지배주주가 적은 보유 지분으로 지배권을 확보할 경우 대리인 비용이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황제 경영이 계속되는 것은 견제 장치들이 존재하지만,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이사회의 사외이사 제도다. 사외이사들이 거수기나 다름없는 상태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또 감사나 감사위원회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문제다. 최고경영자(CEO)를 견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주주들도 기업의 건전한 발전보다는 단기 차익만 노리고 주식을 보유하는 경우가 많아 최고의결기구인 주주총회가 한국에서는 제 몫을 못하고 있다.

김주훈 한국개발연구원 본부장은 "오너 경영은 신속하고 과감한 결정 등 장점이 많지만, 제대로 경영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견제 장치들이 잘 작동해야 한다"면서 "이런 문제에 대해 제도적인 보완 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