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그룹 사건의 핵심은 자산이 140조원에 달하는 그룹의 총수가 선물 투자를 해서 큰 손실을 입었다는 겁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이유를 알아야만 한국식 오너십 경영에 왜 자꾸 문제가 생기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난달 27일 횡령 등 혐의로 징역 4년형이 확정된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범행에 대해 한 전직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회사 돈을 빼돌린 것은 변명의 여지없는 잘못이지만, 최 회장이 왜 그랬는지 알아야 재벌 체제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점을 알 수 있다"고 했다. "회사 지분이 1%도 안 되는 최 회장으로선 지배력을 유지하면서 신(新)사업에 손을 대려면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최 회장이 증권사 직원 출신 무속인에게 "돈을 불려 달라"고 하기 위해 회사 돈에 손을 댄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지만, 재벌 오너들이 예외 없이 겪고 있는 '소수 지분'이라는 구조적인 아킬레스건이 이런 일까지 벌어지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소수 지분'이 탈법 등 무리수 만들어내는 원인

최근 1~2년 새 10곳 가까운 재벌 그룹이, 오너들이 저지른 불법 행위 등으로 경영 공백 등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다. 외형적으로는 오너의 독단적인 경영과 낮은 윤리의식, 무분별한 사업 확장이 원인이지만, 구조적인 원인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오너들이 비윤리적이고 무리한 경영에 나서는 근본 원인 가운데 '소수 지분'이 있다고 지적한다. 얼마 안 되는 지분으로 수많은 계열 회사를 지배하면서 한편으론 경영권을 방어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신(新)사업 진출 등을 추진할 자금을 마련하려면 무리수를 둘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총수가 있는 43개 재벌그룹의 경우 총수 개인의 평균 지분은 2.09%에 불과하다. 미국, 영국 등 선진국 대기업의 대주주 지분이 10%를 넘는 것에 비해 극히 낮은 수준이다. SK그룹 등 최근 오너의 각종 비리가 불거진 기업들은 총수의 지분이 2%에도 미치지 못하고, 주요 10대 그룹의 총수조차도 지분율이 1%가 채 안 된다. SK(0.04%), 한화(1.17%) 등 거의 예외가 없다. 태광(9.17%)과 웅진(8.58%)은 그룹 규모가 상대적으로 크지 않아 총수 지분이 높은 편이다〈그래픽 참조〉.

김우찬 고려대 교수는 "독단적이고 무리한 경영을 해서 문제가 생긴 오너의 대부분은 총수 지분이 너무 많아서가 아니라, 너무 적어서 그렇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면서 "회사는 커지는데 오너의 지분은 적어지니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예컨대 최태원 회장의 SK그룹은 지주회사 체제인데도 지주회사 아래 소속된 자회사는 17곳에 불과하다. 81개에 달하는 계열사 가운데 64개는 지주회사 소속이긴 하지만 간접적으로 총수의 지배력이 미치고 있다는 얘기다. 소수 지분을 가진 총수가 그룹 전체에 경영권을 행사하기 위해 이런 구조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아직은 오너 리스크가 불거지지 않은 재벌 그룹들도 비슷한 상황이다. 재계 순위 30위권인 A그룹의 계열사 CEO를 지낸 한 기업인은 "엉뚱하게 해외법인을 만들었다가 손실을 보거나, 조세피난처에 법인을 세우는 등 총수들이 무리수를 두는 것은 지분이 너무 적어 경영권 방어, 신사업 투자 등을 위한 자금이 모자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소수 지분의 약점 더 불거져

대기업 오너들이 소수 지분이라는 아킬레스건을 갖게 된 것은 거의 대부분이 1960년~1970년대 고도 성장기에 정부가 들여온 외자(外資)를 종잣돈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또 급속하게 성장하는 과정에서 창업자들의 지분이 빠르게 희석된 것이 원인이다.

이런 상황에서 경영권 유지와 신규 산업 진출을 위해 비자금을 만들거나 편법을 동원하는 행위는 창업 1세대 오너들까지만 해도 '경영의 일부'라며 집행유예 등으로 사실상 면죄부를 받았다. 실제로 2000년대 이전까지 재벌 총수들은 명백한 불법 행위가 적발된 경우에도 집행유예나 사면 조치를 받고, 그룹 차원에서 사회공헌을 위해 수천억원대의 출연을 하는 것으로 책임을 면제받았다.

그러나 이제는 과거처럼 불법 행위를 용인해 줄 수 없다는 사회적인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오는 7월부터 대기업 총수들이 ‘소수 지분’을 감추기 위해 사용하던 순환출자에 대해 “새로운 순환출자는 금지된다”는 금지 조치가 시행되는 것이 단적인 예다.

더 큰 문제는 창업자들이 2, 3세로 경영권을 승계하는 과정에서 불거진다. 가뜩이나 적은 지분인데, 정상적인 상속 과정에서 최고 50%의 상속세를 내고 나면 지분이 더욱 희석돼 경영권이 위협받는다. 재벌 2, 3세들이 대주주인 기업에 ‘일감 몰아주기’ 등 탈법이 저질러는 것은 이런 구조 속에서 나온 것이다.

신보성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지난 50년간 한국 경제는 ‘한국형 오너십 경영’의 덕을 본 것이 사실이지만, 이제는 한계에 봉착했다”면서 “오너 경영의 장점은 살려야겠지만, 소수 지분이 만들어 내는 문제점 등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사회적인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