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신용평가사(신평사)의 신용등급은 ‘정크본드(신용등급이 낮은 기업이 발행한 고위험 채권)’ 수준이다. 국내외 투자자는 국내 신평사의 기업평가를 외면한다. 신용평가는 기업채권 발행 등에 사용되는 중요한 지표다.

국내 신평사들은 업체 실적이나 재무상태를 과대평가 한다. 이 탓에 ‘신용등급 인플레이션’이 심각하다. 신평사가 평가대상 업체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는 구조 탓이다.

기업은 신평사의 평가대상이자 고객이다. 신평사는 기업이 주는 평가수수료를 받아 운영된다. 기업은 입맛에 맞지 않는 신용등급을 내는 신평사에게 다시 평가를 맡기지 않을 수 있다. 이로 인해 신평사는 공정성보다 고객 입맛에 맞는 신용평가에 치중할 수 밖에 없다.

◆ “모든 신호등이 초록색인 것과 뭐가 다른가”

국내 중소 증권사 관계자는 “지난해 한 금융사의 신용등급이 갑자기 한 단계 올랐다. 업계에서는 여러 악재가 겹쳐 신용등급이 떨어질 것으로 예상했고 그 회사 재무 관계자도 비슷하게 예상한 터라 모두 의아했다”며 “이런 신용등급 평가는 시장에 혼란을 줄 뿐”이라고 꼬집었다.

해외 증권사들은 국내 신평사 등급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별도로 자체 평가조직을 운영하고 있다. 미국계 증권사 관계자는 “한국 신평사는 모든 신호등을 초록색으로 표시하는 듯하다”며 “외국인 투자자는 등급 인플레이션 현상을 알고 있다. 해외 증권사는 국내 신평사 평가 결과를 존중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유럽계 증권사 관계자는 “해외 투자자들은 전 세계에 투자하기 때문에 기업 신용평가도 다른 나라와 비교한다”며 “국내 신평사의 평가수준이 세계 기준과 비교해 점점 떨어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신평사에 대한 불신은 한국금융투자협회 조사에서도 드러난다. 금투협은 지난해 4월 국내 신용평가사 3사에 대한 평가 결과를 발표했다. 금투협은 국내 채권 관계자 등 1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했다. 신용등급 신뢰도에 대한 설문점수는 5.04점(10점 만점)이었다. 특히 평가독립성 점수는 4.53로 평균(5점) 이하였다.

◆ 국내 신평사 등급인플레이션 심각

해외신평사와 국내 신평사 등급 비교

나이스신용평가, 한국기업평가(한기평), 한국신용평가(한신평) 등 국내 신평사와 무디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피치 등 미국 신평사가 공통으로 평가한 국내 기업 14곳의 등급을 비교했다.

국내 신평사는 KT, 포스코, SK텔레콤, 현대자동차, 우리금융지주에게 최고 등급(AAA)을 매겼다. 해외 신평사는 최고 등급을 1이라 했을 때 평균 4.6에서 8.6까지 낮은 등급을 매겼다. AAA 등급 비율을 봐도 인플레이션 현상은 두드러진다. 이달 기준 나이스신용평가의 AAA 등급은 전체 평가대상의 16.0%나 됐다. 한신평은 15.9%다. A- 이상 등급은 나이스신용평가가 77.0%, 한신평이 80.5%, 한기평이 74.0%다.

국내 대형 증권사 관계자는 "국내 기업도 해외 신평사의 등급을 신뢰한다"며 "해외 신평사는 외부 환경 변화에 따라 등급 변화가 있지만 국내 신평사는 수년 동안 등급을 그대로 유지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무디스는 포스코의 신용등급을 2009년 3월 A1(상위 5번째 등급)에서 2010년 8월 A2, 2011년 4월 A3, 2012년 10월 Baa1, 같은 해 11월 Baa2로 한 단계씩 낮췄지만 국내 신평사 3사는 모두 AAA 등급을 수년째 유지하고 있다.

해외신평사와 국내신평사 등급변화 비교


국내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국내 신평사는 항상 핑크빛 전망을 내세운다"고 지적한다. 신평사는 신용등급 외에도 투자적격 여부 등을 평가한다. 기업분석 능력이 부족한 일반 투자자에게 신평사가 내놓는 전망(Outlook)은 중요한 투자지표다. 국내 신평사 3곳은 똑같이 신용등급 비교 대상 14개사를 모두 '안정적(Stable)'으로 평가했다. 반면 해외 신평사들은 '안정적(Stable)'부터 '부정적(Negative)'까지 등급을 수시 변경했다. 무디스는 KT에 대해 2009년 3월 ~ 2013년 8월 A3등급을 유지했으나 2009년 3월 '안정적'에서 2013년 8월 '부정적'으로 투자전망을 하향조정한 바있다.

◆ 국내 신평사 독립성 떨어져…기업 눈치보기 심각

업계에서는 국내 신평사가 기업 눈치를 봐야 하는 처지라 등급 인플레이션을 피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내 신평사 관계자는 “(신평사가) 평가대상 업체에게 수수료를 받아야 하는 형편이라 독립성을 확보할 수 없다”며 “기업 재무상태가 나빠져도 기업 눈치 보느라 내리지 못하다가 긍정 요인이 생기면 올리다 보니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른 국내 신평사 관계자는 “하락 요인이 있어 섣불리 등급을 내리거나 전망을 부정적으로 내면 해당 기업은 곧바로 ‘다른 곳에 의뢰하겠다’고 나선다”며 “대기업 계열사가 모두 빠져 나가면 회사 매출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강조했다.

국내 신용평가 시장은 ‘발행자 지급 모델(Issuer-pay rating model)’ 위주다. 회사채나 기업어음(CP) 발행 기업이 신평사를 선택하고 수수료를 지불한다.

‘의무 복수 신용평가 제도’도 등급 인플레를 부추긴다. 복수신용평가제는 기업이 신평사 2곳에서 신용평가를 받아 좋은 신용등급을 채택할 수 있게 하는 제도다. 평가 전에 마음에 드는 등급을 제시하는 신평사를 고르는 ‘등급쇼핑’이 가능하다. 기업은 신용등급이 떨어지면 회사채나 CP 발행금리가 높아져 자금조달 비용이 늘어나기 때문에 높은 등급을 제시하는 신평사를 선택하려 한다.

미국, 영국 등에서는 시장의 필요에 의해 신용평가기관이 자생적으로 형성됐다. 직접금융시장 비중이 훨씬 높아 기업 압력도 거의 통하지 않는다. 신환종 우리투자증권 연구원은 “국내 신용평가 시장은 지나치게 기업 중심적으로 이뤄져 있어 신뢰도 저하를 부추켰다”고 지적했다.

◆ “자본시장법 개정으로 나아질 것” VS “역부족”

신평사는 자본시장법에 따라 규제와 감독을 받는다. 자본시장법이 지난해 개정되면서 신평사는 신용정보업체가 아니라 금융투자업종에 포함됐다. 금융당국은 신용평가 시장에 큰 변화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지만 업계 생각은 다르다.

박상윤 금융감독원 신용평가감독팀장은 “자본시장법이 지난해 개정되면서 2012년 3월 발표한 ‘신용평가시장 선진화 방안’이 대부분 포함됐다. 과거와 많이 달라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반면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자본시장실장은 “자본시장법으로 신용평가사를 감독해도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개선될 수 없다”며 “부실 평가는 결국 신평사가 책임져야 하므로 신평사 스스로 독립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