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추가 테이퍼링(양적완화 축소)으로 촉발된 신흥국 금융시장의 극심한 불안에도 우리나라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안전자산 선호현상이 부각된 이후 세계적으로 동조화(커플링)되고 있는 주식시장에선 외국인의 매도세가 이어지고 있지만 외환시장과 채권시장에서는 차별화된 모양새가 뚜렷하다.

과거 위기 때마다 요동쳤던 외환시장은 안정감을 유지하고 있고 채권시장에선 외국인 매수세가 지속되고 있다. 우리나라 국채가 안전자산 대열에 합류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다. 과거와 달리 우리나라의 환율, 자금유출입 등 국가의 디폴트(채무불이행) 기준이 되는 대외 균형에 별다른 문제가 발생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다.

글로벌 위기가 우리나라 경제로 전파되는 패턴이 분명히 달라진 것이다.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외국인 투자자금이 대거 빠져 나가면서 환율 급등 등 대외 균형 붕괴에 이어 자금시장 경색 등 대내 균형 파괴로 이어지는 위기의 도미노 현상으로 매번 곤욕을 치뤘지만 이번에는 대외 균형점에 별다른 이상이 없는 상황이다.

이는 지난해 700억달러를 넘어선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 행진, 7개월 연속 사상 최대치를 갈아치운 외환보유액, 역대 사상 최저치인 단기 외채비중 등 우리 경제의 견실한 펀더멘털이 반영된 결과로 해석되고 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브라질 터키 등 신흥국 경제의 불안에 따른 수출 등 실물 경제 악화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는 커지고 있다. 게다가 우리나라 최대 수출국인 중국 뿐만 아니라 최근 강한 회복력을 보여온 미국 경제도 주춤거리고 있다는 경제지표가 잇따르고 있다.

신민영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앞으로도 해외 금융회사들의 포트폴리오 재배분 과정에서 옥석가리기가 진행되면 우리나라가 다른 신흥국들과 차별화될 여지가 있다"면서도 "올해 내내 미국의 테이퍼링이 100억~200억달러씩 추가로 진행될 텐데 그 과정에서 신흥국의 금융 불안이 장기화되고 이게 그 나라 실물경제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면 우리나라의 수출, 생산, 투자도 부정적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 채권·외환 시장은 '안정'…실물경제 선행 주식시장은 '출렁'

국내 채권·외환시장은 미국의 추가 테이퍼링 발표 후에도 안정된 모습이다. 지난 4일 국채 금리가 4~7bp(1bp=0.01%p) 떨어졌고(채권가격 상승) 5일에도 소폭 오르는데 그쳤다. 미 달러화 대비 원화 환율은 4일 소폭 내린데 이어 5일에는 5.9원 떨어진 1077.9원으로 마감해 완연한 하락세를 보였다.(원화가치 상승)

과거에 대외 악재가 터질 때마다 외국인 투자자금이 빠져 나가면서 채권 가격과 원화 가치가 큰 폭으로 떨어졌던 것과 비교하면 확연하게 차이가 있다. 특히 외국인은 3년만기 국고채 선물을 5345계약 순매수하는 등 5거래일 연속 매수 행진을 이어갔다.

5일 주식시장에서 코스피지수는 전날보다 4.47포인트(0.24%) 오른 1891.32로 거래를 마쳤다. 소폭 반등하기는 했지만 미국의 추가 테이퍼링 발표 후 이틀 동안 각각 1.09%, 1.72% 떨어진 것을 감안하면 미미한 상승이다. 외국인은 이날도 2897억원 어치의 주식을 순매도했다. 추가 테이퍼링 이후 사흘동안 외국인은 우리 주식시장에서 1조3000억원대(3일 4064억원, 4일 6554억원)의 순매도를 기록했다.

안전자산 선호현상에 따른 외국인 자금의 이탈 영향도 있지만 미국과 중국 등 이른바 G2 경기와 신흥국 불안에 따른 실물경제 악화 우려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주식시장은 실물경제의 선행지표다. 그러나 외국인의 매도세는 다른 아시아 신흥국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강하지 않았다. 이날 중국 홍콩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호주 필리핀 등의 주가지수는 1% 내외 하락했고 대만과 필리핀은 2% 정도 떨어졌으나 우리나라는 일본과 함께 상승세였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최근 시장 흐름에 대해 "우리나라는 2008년 세계금융위기에서 회복된 이후 경제 체질과 구조가 완전히 달라졌다"며 "지금까지를 보면 앞으로도 (금융시장 불안과 관련해) 정부가 대책을 내야할 수준까지는 안 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시장 관계자들도 우리나라의 신흥국과 차별화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장희종 하나대투증권 투자전략팀장은 "지금 우리나라 주식시장에서 외국인 투자가들이 순매도하는 것은 우리나라에 대한 불안보다는 신흥국들에서 한꺼번에 빼면서 같이 빠져나가는 것"이라며 "미국의 추가 테이퍼링, 중국 경기둔화 등 불확실성이 있긴 하지만 다음달 정도 되면 차별화가 본격화되면서 분위기가 어떻게 좀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홍정혜 신영증권 연구원은 "채권시장에서는 다음달 말까지 외국인 투자자금이 더 들어올 것"이라며 "다음달 말까지 외국인 채권 잔고가 100조원을 다시 돌파할 수 있다는 정도로 보고 있다"고 밝혔다.

◆ 정부 "대외균형 문제 없다.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가 절대적 힘"

외환시장 등 대외 균형을 견고하게 만든 일등 공신으론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가 꼽힌다. 지난해 700억달러가 넘는 경상수지 흑자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6%를 넘어서 과도하다싶을 정도이며 올해도 400억~500억달러 수준의 흑자가 예상되는 등 상당기간동안 경상수지 흑자 행진을 이어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수출 경쟁력이 유지되는 가운데 투자와 소비 위축을 의미하는 저성장 국면 진입으로 수입액이 감소하고 있어 구조적으로 경상수지 흑자가 지속될 수 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정부는 신흥국 등 대외 상황을 면밀히 점검해 필요시 과감하게 대응한다는 방침이지만 기본적으로 '우리나라 대외 균형에는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대외여건 악화에 따라 외국인 투자자금이 빠져나가거나 원화 환율이 급등해 금융시장이 불안해질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것이다. 기재부 관계자는 "인도 터키 남아공 등이 외국인 자금 이탈을 막기 위해 기준금리를 인상한 것은 대외균형을 위해서 국내 균형(성장)을 희생한 것"이라며 "우리나라는 대외균형에 문제가 없으니까 내수 활성화 등 국내 균형에만 신경쓰면 된다"고 설명했다.

신제윤 금융위원장은 기획재정부 국제금융 담당 차관보 시절에 "우리나라가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세계금융위기 등을 복기해보면 외환위기가 터지지 않으려면 경상수지 흑자, 재정건전성, 단기 외화유동성 등 3가지만 튼튼하면 된다"며 "1997년 외환위기는 경상수지 적자 때문이었고 2008년 금융위기 때는 외화유동성이 문제였다"고 말했었었다. 또 유럽 재정위기는 재정건전성이 문제였다.

현재로서는 경상수지는 계속 대규모 흑자를 지속하고 있고 단기 외채 비율 등 외화유동성도 문제가 없다. 다른 나라와 달리 GDP 대비 국가부채비율도 30%대로 건전한 편이다. 기재부 관계자는 "뭐니뭐니 해도 가장 큰 요인은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라며 "계속 달러가 많이 들어오고 있는데 위험하거나 불안해질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한국은행은 우리나라의 경상수지를 2011년까지와 그 이후로 나눠 보면 구조적으로 달라졌다고 평가했다. 2011년까지는 주로 서비스수지가 적자를 기록했고 상품수지 흑자가 서비스수지 적자를 메우면서 경상수지가 흑자였다. 그러나 2012년부터는 상품수지와 더불어 서비스수지도 흑자를 보이고 있다.

서비스수지는 2008년부터 2011년까지 매년 50~90억달러 적자를 기록했다. 그전에는 적자폭이 100억달러를 넘었다. 반면 2012년 57억3000만달러 흑자로 14년만에 흑자전환한 이후 지난해에도 60억달러 흑자를 기록했다. 상품수지는 최근 꾸준히 연간 300억~400억달러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한은은 앞으로 상당기간 경상수지가 흑자를 지속할 것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