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대문구 회기역 근처의 한우리 문고.

세계 최대 규모 서점인 반스앤노블이 실적 부진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미국 전역에 683개 매장을 운영하는 반스앤드노블은 9주간의 연말 휴일 세일 동안 매출이 6.6% 감소했다고 최근 뉴욕타임스가 보도했다. 반스앤노블은 지난해 상반기 975억원의 손 순실을 내고 최고경영자가 교체되는 우여곡절을 겪은 후에도 회복이 불투명한 상태다. 자구책으로 내놓은 전자책 리더기 ‘누크’마저 선두주자인 아마존 킨들과 격차를 좁히지 못했고 애플 아이북스, 구글 플레이 등 후속주자에게도 밀리면서 상황은 악화했다.

자료=한국서점조합연합회, 그래픽=안지영 기자

새해들어 경남 통영시의 명물서점 이문당의 폐업 소식이 전해진 우리나라 상황도 다르지 않다. 인터넷 서점이 등장한 후 각 지역의 유서 깊은 서점들이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다. 서울에서는 10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진 종로 서적이 지난 2002년 폐업했다. 대전권 최대 서점인 대훈서적은 2009년 자취를 감췄고 그로부터 4년 뒤에는 신림동 고시촌의 상징이었던 광장서적이 사라졌다. 서점조합연합회에 따르면 1994년 5683개에 달하던 서점은 2000년에는 2459개로 급감했고 2013년 기준 약 1700개로 줄었다.

◆ 레미제라블이 실용서로 둔갑…'제살깎기’ 가격 경쟁 치열

<그래프=대한출판문화협회 2013년 한국출판연감>

지난 20년간 지역서점 4000곳이 문을 닫을 동안 인터넷 서점은 공격적으로 덩치를 키웠다. 예스24, 인터파크도서, 알라딘, 인터넷 교보 등 온라인 서점의 시장 점유율은 2005년 16.7%에서 2012년 35.7%로 치솟았다. G마켓, 옥션, 11번가 등 책 시장에 뛰어든 오픈마켓을 포함하면 온라인 도서 시장은 42%에 달한다.

2013년부터 서점업이 중소기업적합업종으로 지정됐지만, 온라인 서점은 적용 대상에서 빠져있다. 이 같은 틈을 노려 지난해 11월에는 CJ오쇼핑이 오즈북스를 론칭하는 등 대기업도 책 시장에 뛰어드는 상황이다.

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르면서 지역서점이 감당하기 어려운 ‘제살깎기’ 할인 경쟁이 심해지고 있다. 출시된 지 18개월 미만의 신간은 할인율을 10%로 유지해야 한다는 현행 도서정가제가 유명무실해졌다. 일부 출판사와 온라인 서점을 중심으로 규제를 교묘하게 피해 가는 편법이 성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알라딘의 신간 쿠폰 발급문자

예컨대 신간 서적을 도서정가제 예외 대상인 실용도서나 중고도서로 둔갑해 할인 폭을 대폭 늘리는 식이다. 알라딘은 신간을 재구매해 중고 서적으로 분류한 뒤 50% 할인된 가격으로 내다 팔면서 출판사들로부터 항의를 받기도 했다.

출판사 더클래식은 소설 레미제라블에 영문판을 함께 제공하면서 어학용 실용도서로 분류해 출시했다. 현재 더클래식의 레미제라블 10권 세트는 온라인에서 최대 52% 할인된 가격인 3만7900원으로 판매되고 있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도서 시장의 가격 경쟁 체계가 지역서점이 생존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지적했다. 출판사와 직거래하면서 책값의 45~55% 수준으로 물량을 대량 가져오는 온라인 서점은 40~50% 할인을 해도 여유가 있는 반면, 지역서점의 상황은 다르다. 지역총판에서 공급가의 70~75% 가격으로 책을 들여오고 매장 운영비와 인건비 등을 제하면 지역서점이 제시할 수 있는 할인 폭은 미미하다.

◆ 대형서점, 지역서점 주 수익원인 참고서 판매까지 혈안

14일 오후 8시 김의수 한우리문고 사장이 텅빈 매장에서 책을 정리하고 있다.

최근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역 인근 지역서점 세 곳이 잇따라 문을 닫았다. 2011년 역 근처에 대형서점 체인인 영풍문고가 들어서면서 경쟁에서 밀려났다. 그 여파는 회기역 근처 한우리 문고까지 닿았다. 20년 전 제법 규모가 큰 2층짜리 서점으로 출발한 한우리문고는 3년 전부터 평수를 좁혀 2층 매장만 운영하고 있다. 김의수 한우리문고 사장은 “동네서점 매출의 70~80%를 차지하는 참고서까지 대형서점이 손을 뻗으면서 우리 같은 영세 상인은 남는 게 없다”고 토로했다.

대형마트들의 ‘반값’ 경쟁이 참고서 시장에도 번졌다. 이마트는 이번 달 기탄교육의 수학참고서 3종류를 세트로 묶어 9900원에 판매하고 있다. 3권을 낱권으로 살 경우 도서 정가는 2만3500원으로, 58% 할인율이 적용된 셈이다. 참고서 6만권을 한꺼번에 대량 매입한 이마트는 앞으로 인기 서적에 대해서도 이 같은 할인 공세를 펼친다는 뜻을 밝혀 서점 업계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국서점조합연합회 관계자는 “공공지식재인 책이 생활용품처럼 반값 할인 대열에 올랐다”고 지적하며 “이런 추세가 가속화하면 소비자 사이에서 지역서점들이 책값을 비싸게 받는다는 왜곡된 인식이 퍼질 수 있다”고 말했다.

◆ 유통공룡 아마존 한국 진입?…도서정가제 올해 안에 통과돼야
글로벌 유통공룡 아마존이 한국시장에 진출한다는 전망이 나오면서 도서정가제 개정안이 하루빨리 통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지난 4일(현지시각) 한 해 매출이 2조3000억원에 달하던 독일 2위 서점 벨트빌트가 아마존에 밀려 파산 신청을 하면서 위기감은 더 커졌다.

12일 오후 6시 광화문 교보문고 매장이 책을 사러 온 소비자들로 붐비고 있다.


교보문고 광화문점을 기준으로 '할인율 10%'를 기본 원칙으로 하는 도서정가제가 적용되는 도서는 13%뿐이다. 출시된 지 18개월이 넘어가는 구간, 초등학교 참고서, 실용서적 등 예외 대상이 많기 때문이다. 이마저도 마일리지 적립 등 추가할인(10%)이 더해지면 실질적으로 책값은 19% 가량 인하된다.

지난해 발의된 도서정가제 개정안은 1년 넘게 국회에 계류 중이다. 개정안은 마일리지 혜택을 포함해 온·오프라인 매장 모두 할인율을 10%로 제한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현행대로 추가 10% 마일리지 혜택(총 할인율 19%)을 주는 방안을 고집하는 인터넷서점계로 인해 이견이 좁혀지지 못하고 있다.

백원근 한국출판연구소 책임연구원은 "도서정가제가 원칙대로 바로 서야 같은 책이 장소마다 천차만별 다른 가격에 팔리는 가격 거품 현상을 해결할 수 있다"며 "출판산업의 기반을 지키기 위해서는 제도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프랑스는 아마존닷컴 등 대형유통사의 저가 물량 공세로부터 출판산업을 지키기 위해 엄격한 도서정가제를 시행하고 있다. 도서할인율을 5%로 제한하는 특별법 ‘랑법’을 시행하고 있고 지난해부터는 인터넷 서점의 무료 배송도 금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