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말 출시된 현대차 신형 제네시스가 5일까지 열흘 만에 8000대 넘게 예약 판매되는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반면, '한 지붕 가족'인 기아차 K9은 점점 패색이 짙어지고 있다.
지난해 5월 '기아차 최고의 프리미엄 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온 K9은 당초 제네시스·에쿠스 등 국산 대형차뿐만 아니라 BMW 7시리즈 같은 독일 고급차 공략까지 자신하면서 월 판매 목표를 2000대로 정했다. 그러나 1년 반이 지난 현재 성적은 참담하다. 지난해엔 월평균 830대가 팔리더니 올해는 450대 수준으로 떨어졌고, 급기야 지난달엔 310대 팔리는 데 그쳤다. 제네시스의 3분의 1, BMW 5시리즈의 4분의 1 수준이다. 국내 최대 중고차 업체 SK엔카에는 지난해 팔린 K9의 30%에 육박하는 물량이 매물로 나와 있다.
기아차 내부에서는 이제 K9이 '금기어'로 분류되고 있다. 4년 5개월의 개발 기간에 5200억원을 쏟아부었고,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도 에쿠스 대신 이 차를 타고 다니며 각별한 애정을 쏟았지만 고급차 시장에 자리를 잡기엔 틀린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회사 고위 관계자는 "모두가 실패인 걸 알고 있지만, 누구 하나 선뜻 실패를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다"면서 "신형 제네시스에 쏠린 관심 때문에 K9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것 같다"고 말했다.
고급차 시장의 판도를 흔들어 놓을 기세였던 K9은 왜 실패했을까. 전문가들은 애초 기아차가 K9 상품 기획 단계부터 단추를 잘못 끼웠다고 보고 있다.
①잘못된 포지셔닝
K9은 에쿠스 크기의 차체에 제네시스급 엔진을 얹어 '제네시스와 에쿠스 사이' 고급 세단을 지향했다. 현대와 기아 간 내부 경쟁을 피하기 위한 선택이기도 했지만, K5와 K7 등 K시리즈 성공에 도취한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포지셔닝이 가장 큰 오류였다는 지적이 많다. 국내 소비자들에게 '1등=에쿠스' '2등=제네시스'라는 인식이 확고하게 자리 잡은 상태에서, 그 틀을 깨고 들어가려는 시도가 무모했다는 것이다. 산업연구원 이항구 박사는 "차라리 K7이 그랜저의 경쟁자로 성공한 것처럼 K9도 제네시스의 경쟁자로 시작해 차차 고급화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양대 홍성태 교수(경영학)는 "가장 나쁜 게 어정쩡한 프리미엄인데, K9은 이 덫에 딱 걸렸다"고 말한다.
▲대형 세단 시장에 진출할 만한 시점인지(Circumstance·환경) ▲과연 무슨 차 대신 이 차를 살 것인지(Competitor·경쟁자) ▲이 차급의 소비자는 뭘 원하고 어떤 성향인지(Customer·소비자) ▲기아가 가진 강점은 뭔지(Competence·강점) 등 '4C'에 대한 파악 자체가 덜됐다는 얘기다. 홍 교수는 "도요타가 크라운이라는 대형 세단으로 고급차 시장에 진출하려다 실패하고 렉서스 브랜드를 만들었지만, 여전히 벤츠·BMW의 맞수가 되지 못하고 있다"며 "프리미엄으로 가는 길은 지난한 일"이라고 말했다.
②너무 비싼 가격
포지셔닝이 이렇다 보니, 출시 당시 K9 3.3L 최저 가격은 동급 제네시스 기본형보다 952만원 비싼 5290만원으로 책정됐다. 웬만한 BMW·벤츠·아우디 중형차를 살 수 있다.
비싼 가격에 대한 저항은 주요 소비 집단인 법인 고객에서 두드러졌다. 법인차 수요가 있는 각 기업·공공기관은 대표급으로 에쿠스, 임원급으로 제네시스를 선택해왔는데, 배기량은 같지만 가격은 1000만원 가까이 비싼 K9을 굳이 선택할 이유를 찾지 못한 것이다.
기아차 자신도 가격이 큰 걸림돌이란 사실을 인지하고 최저가를 5228만원으로 소폭 내렸지만, 여전히 신형 제네시스 최저가보다 568만원이 비쌌다. KT금호렌터카 법인영업팀 관계자는 "에쿠스나 제네시스 출고가 오래 걸릴 때를 제외하고는 K9을 먼저 찾는 경우는 거의 보질 못했다"면서 "K9에 고급 기능이 더 많이 들어가서 비싸다고는 하지만, 사실 소비자들로선 그만한 가격을 더 지불할 이유를 못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③기아 프리미엄의 한계
근본적으로는 기아차 브랜드가 갖는 한계를 얘기한다. '디자인 기아'로 이미지를 쇄신한 지 불과 5~6년밖에 지나지 않아서 프리미엄 브랜드가 추구하는 종착역인 최고급 세단에 도전한 것은 너무 성급했다는 지적이다. 차라리 모하비를 더 고급화한 프리미엄 SUV(스포츠 유틸리티 차량)를 내놓는 식으로 먼저 틈새시장을 공략하면서 고급 이미지를 쌓아가는 편이 나았을 것(KB투자증권 신정관 박사)이라는 지적도 있다.
기아차 고위 관계자는 "급하게 욕심내지 않기로 했다"면서 "디자인을 수정해 내년 초 2014년형 K9을 내놓겠다"고 말했다. 기아차는 내년 초 미국에 K9을 출시해 세계 고급차 시장에서 본격적인 평가를 받을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