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절반 이상을 무역과 세일즈 비즈니스에 종사하면서 쓰디쓴 시련에 부딪히기도 하고 달콤한 성취감을 맛보기도 했다. 기억에 남는 사람도 있고 잊힌 사람도 있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 봤을 때 나에게 좌절을 안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절대 잊을 수 없는 누군가가 있다. 바로 'ET'다.

ET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1982년 연출한 미국 영화다. 개봉 당시 흥행 신기록을 세웠을 정도로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영화 속 ET는 주름진 얼굴에 괴상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왜 그런지 모르게 친근한 캐릭터로 인식되어 국적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큰 인기를 얻었다.

ET와 나의 만남은 1982년 미국발 한국행 비행기에서였다. 당시 나는 37세에 화승 수출 담당 이사로 스카우트되어 한국에서 생산한 신발을 미국에 수출하는 업무를 맡고 있었다. 대규모 수출 계약을 성사시켜 미국에 지사까지 설립했고, 지사의 독립적 수익 모델을 개발하기 위해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바쁘게 일했다.

지난 18일 서울 서초동 휠라코리아 사무실에서 윤윤수 휠라 글로벌 & 아쿠쉬네트 컴퍼니 회장이 ET 인형을 바라보며“내게 큰 실패를 안겨준 인형이지만 한편으론 저작권과 라이선스의 중요성을 일깨워줬다”고 말했다.

어느 날 미국 출장에서 돌아오던 길이었다. 비행기 안에서 경제 주간지를 봤는데 표지에 괴상한 물체가 자리 잡고 있었다. ET였다. 영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주간지 표지에 나올 정도면 인기가 굉장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다년간의 무역업으로 감각을 키워온 나는 '바로 이거다' 싶었다. ET 인형을 만들어 미국에 팔면 엄청난 수익을 얻고, 결과적으로 미국 지사의 든든한 비즈니스 모델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ET 인형 제작을 지시했다. 샘플을 만들어 미국에 보내니 인기리에 팔린다는 낭보를 받았다. 곧바로 대대적 생산 라인을 갖추고 미국에 수출할 계획을 세웠다. 순간의 아이디어 하나로 엄청난 수익을 상상하고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부풀 대로 부푼 희망은 순식간에 악몽으로 바뀌고 말았다. ET 인형에 대한 저작권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미국에 컨테이너 6개 분량의 인형 완제품을 실어 보낸 며칠 후, 미국 세관에서 연락이 왔다. ET 인형 저작권을 가진 회사가 제소해 반출이 금지되었으니 폐기하든지 되가져가든지 이른 시일 안에 처분하라는 것이었다. 황망하게 미국으로 갔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 많은 양을 버릴 곳도 없었고, 되가져와 봐야 운송비만 날릴 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그 많은 인형을 오클랜드 항구에서 불태워 버릴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18만달러를 공중으로 날려버린 것이다.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이미 만들어 놓은 인형과 생산 공장이었다. 그래서 그해부터 다음 해까지 서울 장안에는 ET 인형이 리어카 행상마다 넘쳐났다. 그렇게 일정 부분 재고를 해결했지만 문제는 여전했다. 생산 업체가 한둘 부도로 쓰러지고 그 여파는 본사까지 미쳤다. 결국 회사는 40만달러나 되는 손해를 입고 말았다.

저작권에 대한 의식화가 되어 있지 않아 회사에 큰 피해를 주었고 당연히 책임은 내가 져야 했다. 회장을 찾아가 사의를 표했지만 회장은 극구 만류했다. 화승에 입사한 지 3년 만인 1984년 2월, 나는 회장이 받지 않겠다는 사표를 우편으로 부치고 회사를 뛰쳐나왔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회사를 그만둔 탓에 딱히 이렇다 할 계획도 없던 내가 다시 떠올린 사업 아이템은 '휠라'였다. 화승에서 신발 수출입 업무로 해외 출장이 많았던 나에게 휠라는 그냥 지나치기에는 눈에 띄는 브랜드였다. 당시 휠라는 깨끗하고 고급스러운 이미지로 미국에서 의류 부문이 인기가 높았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신발 부문은 취약했다. 나는 신발 기획과 생산 및 유통에 나름대로 노하우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성공시킬 자신이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급한 마음에 무작정 뛰어들어 신발 생산부터 했을지 모르지만, 이미 ET 인형 사건을 겪은 뒤였다. 휠라 본사를 찾아가기 전에 신발 부문에 대한 라이선스를 누가 갖고 있는지 알아보았다. 아쉽게도 한 달 전 한 미국인 사업가가 해당 권리를 소유했다는 것이다.

그를 찾아가 공동 사업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기에 지속적으로 그를 설득하고 그의 부인까지 만나 호소해 결국 승낙을 받아냈다. 그는 신발에 대한 노하우나 해외 비즈니스 경험이 전무했기에 내가 사업 전반을 지휘했다. 피트니스 운동화 라인으로 미국 시장에 진출한 휠라는 소비자에게 선보이자마자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주문이 밀려 생산이 뒤따르지 못할 정도였다. 이 일을 계기로 내 이름 윤윤수(Gene Yoon)는 세계 신발 업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휠라 본사는 예상치 못한 신발의 인기에 고무되어 결국 라이선스를 다시 사들여 미국 시장에 직접 진출했고, 그 책임을 나에게 맡겼다. 그 후 1991년에는 한국 지사장, 2007년에는 휠라 글로벌을 인수해 현재까지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31년 전 비행기 안에서 내가 ET를 보지 않았더라면, 혹은 ET 인형의 저작권 문제를 사전에 인지하여 아예 판매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면, 나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아마 평생 회사원으로 일하다 정년퇴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ET 인형은 내 비즈니스 인생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었지만, 반대로 다시 일어설 때 잊을 수 없는 교훈을 주었다. 나에게는 단순히 영화 캐릭터가 아닌 저작권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 스승이다.

[윤윤수 회장은]

말단 사원으로 시작… 글로벌 기업 회장 오른 '샐러리맨 신화'

윤윤수(尹潤洙·68) 휠라 글로벌 & 아쿠쉬네트 컴퍼니 회장은 '샐러리맨 신화'가 거론될 때마다 언급되는 인물이다. 말단 사원으로 출발해 글로벌 기업의 회장까지 올랐다.
경기 화성에서 태어난 윤 회장은 서울고와 한국외국어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서울대 의예과에 들어가겠다는 일념으로 세 번 도전했으나 실패했다. 재수 때는 2지망으로 치의예과에 붙었으나 삼수를 선택했다. 삼수에서도 불합격하자 아예 진로를 바꿨다.

대학을 졸업하고 해운공사에 입사한 뒤 미국의 유통업체인 JC Penny 한국 지사를 거쳐, 신발 제조 업체인 화승에서 일했다. 1991년 휠라 이탈리아 본사와 합작해 휠라코리아를 세워 지사장으로 있다가 2007년 휠라 본사를 인수했다.

이탈리아 본사 회장은 "휠라가 태어난 곳은 이탈리아지만, 꽃을 피운 곳은 한국"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당시 월급쟁이로서는 가장 많은 연봉 18억원을 받았다.

윤 회장은 휠라를 성공시킨 공로로 2010년 휠라의 고향인 이탈리아 비엘라 명예시민으로 위촉됐다. 2011년에는 골프용품 업체인 아쿠쉬네트 컴퍼니도 인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