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공장 노동자들 사이에서 쓰는 '기름밥 먹는다'는 표현은 삼성자동차 부산공장에서는 통하지 않는 말이었어요. 전장라인은 물론 조립공정까지 일류 호텔에 맞먹을 만큼 청결하게 만들었거든요. 그 땐 몰랐는데 돌이켜보면 삼성전자(005930)반도체 공장에 적용했던 '클린룸'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네요." - 1990년대 삼성자동차 설립을 주도했던 한 원로 기업인의 회상.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자신의 숙원사업이었던 자동차도 초일류 제품이 되길 원했다. 또 초일류 제품은 초일류 시설에서 나온다고 믿었다. 덕분에 삼성자동차 부산공장에 들어가는 설비들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들이었다. 대부분의 공정을 자동화해 다른 자동차 공장에서는 사람이 하는 일을 부산공장에서는 기계가 대신했다. 부산공장 설립 20여년이 지난 현재, 부산공장은 설비가 일부 노후화 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다른 자동차 공장에서는 느낄 수 없는 아우라(독특한 기운)를 풍긴다.
◆ 반도체 공장 같은 자동차 공장
그러나 삼성자동차(현 르노삼성자동차) 부산공장 건립은 시작부터 첩첩산중이었다. 우선 삼성그룹이 자동차 시장 진출을 선언하자 현대차·기아차·대우자동차(현 한국GM) 등 기존 자동차 업체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내수 시장이 연간 100만대 수준인 나라에 자동차 회사가 하나 더 생기면 제 살 깎아먹기 경쟁이 불가피하다는 이유에서다. 자동차 회사들은 연합해 상경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정부 인허가가 떨어졌지만 이번에는 공장 부지가 문제였다. 부산공장이 위치한 신호공단은 바닷가 갯벌을 메워 만든 탓에 지반이 너무 연약했다. 중장비가 동원된 자동차 공장은 하중이 수십~수백톤에 달한다. 특히 철판을 얆게 펴고 차에 알맞게 구부리는 '프레스' 공정은 중장비가 아래위로 찍어 누를 때마다 바닥으로 엄청난 압력이 가해진다. 공장을 지으려 하자 벌써 지반 일부가 내려 앉았다.
하는 수 없이 무너져 내리는 부지 지하에 철 기둥을 촘촘하게 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박은 파일(철심)이 1만 7000여개. 무른 지반을 다지고 철심을 박는데 든 비용이 수조원에 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0년 프랑스 르노그룹이 매물로 나온 쌍용차에 대해 인수 의향을 밝혔던 것도 부산공장과 달리 바닥이 단단한 쌍용차 평택 공장을 탐냈기 때문이라는 설(說)이 있을 정도다.
이처럼 힘든 과정을 거쳐 설립된 부산 공장이었지만 시기가 좋지 않았다. 1997년 촉발된 외환위기 여파로 삼성자동차는 곧 위기를 맞았다. 초일류 시설 건설을 위해 과도한 부채를 끌어 썼던 탓에 삼성자동차는 금세 한계에 부딪혔다. 결국 삼성의 자동차 사업은 삼성자동차 설립 만 4년여 만에 법정관리를 통해 르노자동차에 인수되는 운명이 되고 만다.
◆ 첫번째 위기, 택시로 돌파
'IMF'라는 파고 이후 주인이 바뀌기는 했지만 삼성자동차의 사정이 당장 나아지지는 않았다. 르노가 삼성자동차를 인수한 초기 회사를 먹여 살린 건 'SM5' 택시였다. 교체 주기가 짧은 타이밍 벨트와 점화플러그 등 주요 부품의 내구성이 강하다는 입소문이 택시 기사들 사이에 퍼지면서 SM5 택시가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다. SM5의 타이밍 벨트는 고무 재질이 아닌 금속성 체인으로 만들어 반영구적으로 쓸 수 있다. 점화플러그 역시 당시 경쟁차종보다 내구연한이 최대 5배나 긴 10만㎞에 달했다.
차가 정비소에 들어가면 곧바로 매출에 타격을 받는 택시 입장에서는 획기적인 차였다. 덕분에 2000년 르노삼성자동차로 간판을 바꾼 뒤 2001년 약 3만대의 차를 택시로 팔았지만, 이듬해에는 7만대까지 택시 판매가 늘었다. 거리에 많은 SM5 택시들이 보이기 시작하자 소비자들은 안심하고 르노삼성차를 사기 시작했다. 자동차 전문가들인 택시 기사들이 SM5를 산다면 안심해도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후 2010년까지 르노삼성차 부산 공장의 가동률은 비교적 높은 수준으로 유지됐다.
부산공장의 두 번째 위기는 2011년 찾아왔다. 글로벌 경기 침체와 내수시장 위축이 맞물리면서 르노삼성차의 자동차 생산량이 급감했다. 르노삼성차 자동차 생산량은 2010년 27만5000대로 정점을 찍었다가 2011년 24만4000대로 내리막을 타기 시작하더니 지난해는 14만4000대로 반토막이 났다. 부산공장의 생산능력이 연간 30만대 수준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설비의 절반은 사실상 개점 휴업 상태인 셈이다.
올 상반기 판매량 역시 판매량 8만3062대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29.3% 감소했다. 특히 올 상반기에는 한때 인수까지 검토했던 쌍용자동차에 밀려 내수 판매량 꼴찌(5위)를 기록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 두 번째 위기는 위탁생산으로 돌파?
르노삼성차가 첫 번째 위기를 택시 판매를 통해 돌파했다면 두 번째 위기를 넘는 열쇠는 위탁생산에 달렸다. 르노 그룹이 닛산은 물론 일본 미쓰비시까지 전략적으로 연대하고 있다는 점에서 잘만하면 글로벌 생산 거점기지로 육성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 일본 니케이는 세 회사의 연간 자동차 판매량이 900만대로, 일본 도요타, 독일 폴크스바겐, 미국 제네럴모터스에 이어 세계 자동차 4강 체제를 만들 수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 르노-닛산 얼라이언스와 미쓰비시는 전략적 협력을 통해 개발한 첫 번째 중형 세단을 부산 공장에서 생산키로 했다고 5일 밝혔다. 이 신차는 미쓰비시가 미국·캐나다 시장을 겨냥해 출시할 중형급 세단(D-세그먼트)으로, 정확한 출시 시기와 생산량 등 구체적 계획은 아직 논의 중이다. 앞서 르노삼성차는 닛산의 스포츠유틸리티차(SUV) '로그'를 내년부터 연간 8만대씩 생산하기로 했다.
내년에 부산공장 가동률을 작년 만큼만 유지해도 생산량을 23만대 수준으로 늘릴 수 있는 셈이다. 여기에 새로 개발될 미쓰비시 자동차까지 생산하면 부산공장을 풀가동 할 날도 머지 않았다. 비록 자체 브랜드가 아닌 타 브랜드 위탁 생산이지만, 공장 가동률만 높이면 신차 개발 여력도 생길 수 있다
김기찬 가톨릭대 경영학과 교수는 "타 브랜드 위탁생산은 단기적으로 가동률을 높이는 데 도움은 되겠지만, 근본적으로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서는 신차 개발 역량을 축척하는 등의 노력이 따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