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들어 3분기(7~9월)까지 국내 30대 그룹의 연초 투자 계획 대비 집행률이 67%에 불과한 것으로 집계됐다. 연말이 바짝 다가왔지만, 연초 계획한 투자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한 경제 단체의 고위 인사는 29일 "30대 그룹이 연초 세운 투자 계획 대비 집행률을 집계 비교한 결과, 투자 계획은 총 148조8000억원이었지만, 9월 말까지의 투자 집행률은 3분의 2 수준"이라며 "이대로라면 올 연말까지 투자 집행률이 90%에도 못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30대 그룹은 지난 8월 산업통상자원부에 올 투자액을 연초 대비 4% 증액한 155조원으로 늘리겠다고 했지만, 아예 연초 계획조차 달성하기가 버거운 상황이 됐다.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오른쪽에서 첫째)이 29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30대 그룹 사장단 ‘투자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윤 장관은 재계에 “투자와 고용에 적극 나서 달라”고 촉구했다.

이런 대기업 투자 부진은 최근 회복 기미를 보이는 우리 경제에 큰 부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이날 기획재정부·공정거래위 등 기업 규제 관련 부처 차관 등을 대동하고 30대 그룹 사장단과 간담회를 가진 것도 이런 위기감을 반영하고 있다.

윤 장관은 기업들에 투자 약속 이행을 압박했다. 그는 "대통령이 8월 27일 10대 재벌 총수들을 불러 투자와 고용 촉진을 당부하고 애로사항을 많이 들어줬다"며 "경기가 회복되고 있으니 이제 여러분이 (투자) 약속만 지키면 된다"고 했다.

반면 재계에서는 투자 부진의 원인으로 과도한 규제를 꼽았다. 미국 연방정부 셧다운, 원화 가치 절상 등 불확실한 대내외 경제 여건도 있지만, 경제 민주화법과 노동·환경 관련 규제 등이 기업 투자를 저해하는 주요인이라는 것이다. 이날 간담회에선 규제에 대한 불만들이 쏟아져 나왔다.

경제 민주화 입법 마무리를 촉구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이승철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은 "상반기에 경제 민주화 관련 법들이 많이 통과됐다"며 "지금도 많은 경제 민주화 법안이 국회에 계류 중인데 이제는 어느 정도 마무리하고 기업이 투자에 매진할 수 있도록 정부가 도와달라"고 했다. 이에 대해 공정거래위 정재찬 부위원장은 "이제 남은 법안은 신규 순환출자 금지와 금산(金産·금융과 산업) 분리 관련 법안 정도"라고 답했다.

이상훈 삼성전자 사장은 "반도체가 공급 부족이어서 내년 투자를 앞당겨 추진하고 있다"며 "화성 사업장에 신규 반도체 라인을 지으려는데 건설 부지가 산업 단지와 택지 지구에 겹쳐 있어 각각 건축 허가를 따로 받아야 하는 형편"이라고 중복 규제 문제를 지적했다.

노동 문제에 대한 불만도 컸다. 정진행 현대차 사장은 "고용 유연성이 이렇게 없고 고용 형태를 (정부가) 규제하는 나라가 어디 있느냐"며 "(정부 노동정책은) 기업이 망하는데 해고를 못 하게 막는 것"이라고 말했다. 통상임금 문제도 지적됐다. 최인범 한국GM 부사장은 "통상임금에 상여금이 포함되면 기업의 노동 비용이 급증한다"며 "규제를 도입할 때도 기업 경쟁력을 고려해 완급을 조절해달라"고 했다.

통상임금 문제는 작년 3월 대법원 1부가 기존 고용노동부의 지침과 달리 '정기상여금도 통상임금에 포함된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리면서 노사(勞使) 간 최대 쟁점으로 부각됐다. 대법원 전원 합의체는 올해 안에 이 문제에 대한 결론을 내릴 예정이다.

환경 관련 과잉 규제에 대한 불만도 나왔다. 송재희 중소기업중앙회 상근 부회장은 "'화학물질 등록 및 평가에 관한 법(화평법)에 따라 신규 화학물질까지 등록해야 하는 상황이라 기업의 경쟁력 약화가 우려된다"며 "화학 사고 시 매출액의 5%까지 과징금을 부과하는 화학물질관리법 때문에 중소·중견기업들도 투자를 주저하고 있다"고 했다.

정부는 "최대한 기업들의 애로를 감안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간담회를 마치고 나온 기업인들은 "간담회에서 정부가 확실하게 규제 철폐를 약속한 것은 거의 없다"며 "기존 방침만 되풀이하는 수준이었다"고 말했다.

이날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 주재로 열린 서울상공회의소 회장단 회의에서도 경제 민주화법 등 규제 완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회장단은 "경제계의 가장 큰 현안은 통상임금과 근로시간 단축 문제"라며 "근로시간을 단계적으로 단축하는 데는 동의하지만, 프랑스처럼 '투자하기 어려운 나라'로 알려져 투자 유치가 힘들어질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