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농사는 당근 약간 빼고는 다 망했어요. 수확이 많아서 몸만 힘들지, 남는 게 없어요."

지난 8일 강원도 대관령면 횡계리. 이곳에서 농사를 짓는 유영환씨는 올해 작황을 묻자 "빛 좋은 개살구"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올해 무·배추·고추·마늘·양파 등 5대 채소의 생산이 37년 만에 전부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고, 대형 유통업체들은 작년보다 김장 비용이 30% 가까이 떨어질 것으로 예상한다. 대풍(大豊)으로 소비자들의 장바구니 걱정은 크게 줄었지만, 농촌에는 유씨처럼 절망에 빠진 농민이 가득하다. 수확이 늘자 거의 모든 채소값이 작년보다 40% 이상 떨어진 까닭이다. 수지가 안 맞아 수확을 포기해 버려진 밭이 속출하고 있고, 아예 목숨을 끊는 농민도 나오고 있다.

대관령 원예농협에 따르면 강원도 고랭지 배추밭의 70% 정도가 올해 적자를 볼 전망이다. 생산비도 못 건지는 경우가 열에 일곱이라는 얘기다. 이찬옥 농협중앙회 채소사업소 팀장은 "9월 중순 이후 채소값이 줄곧 하락세"라며 "값이 안 맞아 수확도 못 한 배추가 고랭지에만 3만t쯤 된다"고 말했다. 농민들이 배추를 시장까지 운반하는 데 드는 비용도 안 나오니까 밭에 그냥 버려둔다는 것이다.

풍년이 되면 농산물값이 크게 떨어져 오히려 농민들의 목줄을 죄는 '풍년의 역설(逆說)' 현상은 올해도 반복되고 있다. 우리 농촌에선 농작물 생산이 늘면 농가 소득이 줄고, 생산이 줄면 오히려 농가 소득이 늘어나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08년 이후 5년 중 4년은 농작물 생산량과 농가 소득이 거꾸로 움직였다. 2011년에는 쌀·채소 생산이 늘었는데 농가 소득은 200만원이 줄었고, 작년에는 쌀·채소 생산이 줄었는데 농가 소득은 거꾸로 100만원이 늘었다.

'풍년의 역설'로 지금은 농민들이 고통을 받지만, 올겨울이 되면 도시 소비자들의 장바구니 물가가 뛸 것으로 우려된다. 풍년으로 큰 손해를 본 농민과 산지 유통 상인들이 겨울 채소 재배를 주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산지 유통 상인들이 농민에게 계약금을 주고 겨울 채소 재배를 맡기려면 돈이 필요한데, 대풍에 빚더미에 앉은 상인이 많아 겨울 채소 재배에 필요한 돈이 부족하다는 얘기다. 유통업계에 따르면 최근까지 겨울 배추 계약 재배율은 가능한 재배 면적의 30%에 불과하다. 산지 유통인 강영철씨는 "내년에 출하될 겨울 배추는 모자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농업 전문가들은 날씨 영향을 크게 받는 농업 성격상 이렇게 롤러코스터처럼 농산물값이 급변하는 게 불가피한 측면은 있지만, 우리 농산물의 후진적 유통 구조가 더욱 피해를 키우고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 농산물 유통은 영세한 농민과 전문성이 부족한 유통 상인에게 전체 유통 물량의 80% 이상을 의존하고 있다.

남양호 국립농수산대학 총장은 "생산량이 5~10%만 변해도 가격은 50% 안팎 급등락하는 농작물값을 안정시키려면, 농작물이 시장에 한꺼번에 쏟아지거나 뚝 끊어지지 않도록 연중 공급량을 조절해야 한다"며 "영세한 농민과 유통 상인에게 부담을 지우지 말고, 그동안 역할이 미미했던 농협이 본래 구실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