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오전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열린 동양증권 노동조합의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 특경법 위반 고소 기자회견에서 한 노조원이 자살한 직원의 유서를 낭독하고 있다.

"회장님 이러실 순 없잖아요."

동양그룹 계열사의 한 여직원이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에게 '원망 섞인'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었다. 숨진 직원은 동양증권 제주지점에서 10년째 일하던 고모(42) 대리였다. 꼼꼼한 일처리로 동료와 고객들로부터 신뢰를 받아온 고씨는 지난 9월 말 동양그룹 계열사들이 줄줄이 법정관리를 신청한 직후부터 큰 심적 고통을 겪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두 아이의 어머니이자 한 남편의 아내인 고씨. 누가 그녀를 죽음으로 내몰았을까.

그녀가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 건 지난 10월 2일이다. 이날 오후 3시9분경 제주시 조천읍 신촌리 도로변에 세워진 아반떼 차량에서 고씨가 숨져 있는 것을 지나가던 주민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고씨가 있던 차량 안에서는 냄비와 함께 번개탄 두 개가 발견됐다. 경찰 관계자는 고씨가 냄비 안에 번개탄을 피워 놓고 목숨을 끊었다고 말했다.

고씨는 이날 새벽 2~3시 사이에 가족들에게 유서를 남기고 집을 나선 것으로 확인됐다. 이후 고씨의 가족들은 그녀와 연락이 닿지 않자 경찰에 미귀가 신고를 했다.

이튿날 고씨 죽음의 원인을 추측해 볼 수 있는 구체적 정황이 나왔다. 제주지역 모 일간지 기자가 고씨의 유족들로부터 입수한 유서 두 장을 공개하면서다.

유서 하나는 고씨가 가족에게 남긴 것이고 하나는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에게 남긴 것이다. 고씨는 가족에게 남긴 유서에서 "여보 정말 사랑하고 미안해, 얘들 잘 부탁할게. 이런 선택을 하게 돼서 미안해. ○○(딸)야 ○○(아들)야 사랑한다. 엄마가 지켜줄게"라며 미안한 마음을 가득 담았다.

고씨의 자살 원인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근거는 현 회장에게 남긴 유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은 고씨가 현 회장에게 남긴 유서의 전문이다.

"동양회장님 개인고객들에게 정말 이러실 수는 없는 거 아닌가요. 이런 일을 만들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그리고, 직원들에게도 이러실 수 없는 거 아닌가요. 회장님을 오늘 아침에 출근할 때도 믿었습니다. 제 고객님들, 정말 제 고객님들께 조금이라도 이자 더 드리면서 관리하고 싶었고 정말 동양그룹을 믿어서 권유한 겁니다. 이런 일이 생겨서 정말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어요. 하루속히 개인고객님들 (일이) 전부 해결됐으면 합니다. 끝까지 책임 못 져서 정말 죄송합니다. 회장님 제 고객님들 (돈) 전부 상환 꼭 해주십시오."

고씨가 유서를 정확히 언제 작성했는지는 확인이 안 됐다. 단 "회장님을 오늘 아침에 출근할 때도 믿었습니다"라는 문장을 통해 고씨가 지난 9월 말부터 동양그룹 주요 계열사들이 법정관리를 신청한 이후 심적 고통을 받았고 이 때문에 자살을 선택한 것 아니냐는 짐작이 가능하다.

현재 동양증권 노조는 "현재현 회장이 계열사 중 하나인 동양시멘트는 부도가 나지 않는다며 시멘트 주식을 담보로 발행한 기업어음 판매를 동양증권 직원들에게 사실상 강요해놓고 법정관리를 신청하는 바람에 고객들의 피해를 키웠다"고 주장하고 있다. 고씨의 죽음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게 대체적 시각이다.

◇ 동양시멘트 법정관리 신청한 날에도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 시도

실제로 고씨는 동양시멘트가 법정관리를 신청한 지난 10월 1일에도 집을 나가 바다에 뛰어드는 등 자살을 시도했다. 고씨 또한 여느 동양증권 지점 직원들과 마찬가지로 계열사들의 회사채를 판매해 왔으며 나중에 이 금융상품이 휴지조각이 될 경우 고씨로부터 해당 금융상품을 산 고객들의 피해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특히 좁은 제주지역 특성상 고씨가 투자자들과 서로의 사정을 소상히 알며 친하게 지내왔기 때문에 고씨가 받은 심적 고통은 더 컸던 것으로 전해졌다. 익명을 요구한 동양증권 제주지점 한 관계자는 "고씨는 7년간 입·출금 업무를 해오다 3년 전부터 투자상품을 판매하는 일을 담당했다"며 "자신을 믿고 투자한 지인들과 다른 투자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증권계에 첫발을 내디딘 고씨는 2003년 동양증권 제주지점이 생길 당시 창립 멤버로 들어와 일해왔다. 제주지점 직원들은 고씨가 평소 꼼꼼한 일처리로 동료들과 고객들로부터 두터운 신망을 쌓아왔다고 전했다. 그런 고씨였기에 자신이 관리한 고객들이 피해를 본다는 사실은 큰 심적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고씨가 숨진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동양증권 직원들의 분노는 여전히 극에 달해 있다. 동양증권 노조는 지난 10월 8일 연 기자회견에서 현 회장을 '살인마'라고 표현하며 격한 감정을 드러냈다. 또 이날 노조는 현 회장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죄로 검찰에 고소했다.

현 회장을 둘러싼 법적 다툼과는 무관하게 고씨를 애도하는 물결은 계속되고 있다. 동양증권 직원들은 지난 10월 3일 사내망에 고씨의 죽음을 애도하는 게시판을 개설했다. 노조 관계자는 현재까지 수백 개의 추모글이 올라와 있다고 말했다.

고씨가 근무했던 제주지점 또한 일주일째 가슴 한쪽에 근조 리본을 달고 업무를 돌보고 있다. 고씨의 유족들을 위한 성금 모금도 진행되고 있다. 노조 관계자는 "유족을 돕기 위해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성금을 모금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고씨의 가족들은 딸을, 아내를, 어머니를 잃었다는 충격에 쉽사리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고씨의 남편(44)은 "아내가 회사 업무 때문에 많이 힘들어했다"며 "당분간 (신경을 못 쓰니) 아이들을 잘 돌봐 달라고 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그는 "가족 모두 너무 힘겨워하고 있다"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부푼 꿈을 안고 증권계에 첫발을 내디뎠던 고씨. 동양그룹 사태는 고씨의 꿈뿐만 아니라 가족의 희망까지 깡그리 앗아가 버렸다.

[- 더 많은 기사는 2013년 10월 14일 발매된 주간조선 2277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