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 3가와 4가 사이의 약 30m의 길에 서면 남과 북으로 정반대의 광경을 마주할 수 있다. 북쪽으론 빌딩 숲 가운데 풀과 나무가 우거진 '종묘'가 보이고, 남쪽으론 육중하게 자리한 콘크리트 건물 '세운상가'가 종묘를 마주 보고 있다.

조선시대 가장 중요한 건축물로 여겨지던 '종묘'와 1970년대 산업화 시기를 대표하는 건축물 '세운상가'는 서로 채 200m도 떨어져 있지 않지만 570여년 가까이 시간 격차를 두고 지어진 만큼 건축적 특징이 판이하다.

고성능 카메라로도 한 컷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낮고 길게 이어지는 종묘의 정전과 거대한 돌덩어리가 들어앉은 듯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며 대지를 차지한 세운상가는 형태만 봐도 대조적이다.

한글날인 지난 9일 오전 9시, 서울 종로구 훈정동에 있는 종묘(宗廟) 앞은 이른 시간임에도 일본 관광객들과 대학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서울 도심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조선시대의 분위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어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 이곳은 조선왕조의 왕과 왕비들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종묘는 2010년 숭례문 화재 소실 사건 이후 토요일 자유 관람을 제외한 나머지 요일에는 문화재 해설사가 동행하는 시간제 관람으로 운영되고 있다. 매표소에서 신분증을 제시하면 나이에 맞는 티켓을 발권해준다. 외국인과 만 25세 이상~65세 이하 내국인은 1000원, 그 외 무료입장이 가능하다.

오전 9시 20분, 문화재 해설사의 안내에 따라 정문인 '외대문'을 통과해 들어가니 가장 먼저 세 부분으로 구분된 돌길이 눈에 띄었다. 이 길은 임금보다 더 높은 조상의 영혼이 다니는 길을 '신로'라 불린다. 궁궐이라면 임금이 걷는 '어로' 역할을 하겠지만, 종묘에서는 임금조차 밟을 수 없는 길이다.

종묘 내부의 신로

신로를 따라 종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니 일자형 건물 ‘향대청’과 ‘재궁’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향대청은 제사에 반드시 필요한 ‘향’·‘축’·‘패’를 제사 하루 전 임금이 하사해 보관하는 곳이고, 재궁은 임금과 세자가 제례를 위한 준비를 하는 공간이다. 이곳 담장 안에서는 담장 밖에서는 ‘신로’라 불리던 가운데 길이 다시 궁궐의 ‘어로’ 역할을 한다.

역대 임금의 위패가 있는 ‘정전’의 동쪽 문 옆에는 ‘전사청’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은 제사 음식을 정비하던 곳이다.

배은영 종묘 문화재 해설사는 “전사청 앞에는 천막단과 희생단이라는 단상을 만들어 완성된 음식의 상태를 왕이 직접 점검했다”고 말했다.

종묘에서 가장 핵심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건물로 바로 ‘정전’이다.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이곳은 경건함을 강조한 건물답게 경복궁이나 창덕궁, 창경궁의 건물과 달리 검은색 지붕과 붉은 기둥만 있을 뿐 단청이 없었다.

종묘 정전

정전은 현재 국내에서 가장 긴 1층 목조 건물로 가로 길이만 101m로 조상을 모시는 신실 열아홉 칸과 두 칸의 협실, 그리고 양 끝에 있는 동·서월랑 다섯 칸으로 이뤄져 있다. 정전은 더 많은 왕과 왕비들의 신위와 신주를 모시기 위해 증축을 거듭해 지금의 모습에 이르렀다.

신주란 높이 30cm, 가로세로 15cm의 밤나무로 만들어진 공간으로 상하좌우 앞뒤에는 ‘규’ 또는 ‘혼구멍’이라고 불리는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

종묘 정전

현재의 정전은 기존 건물이 임진왜란 때 왜적에 의해 소실된 이후 광해군과 영조와 헌종 당시 증축된 건물이다. 100년을 두고 증축된 건물이지만, 건물의 기둥과 지붕이 곧고 뒤틀림이 없다.

정전 앞 넓은 돌바닥인 ‘월대’는 크기와 모양이 서로 다른 돌이 깔린 곳이다. 월대 곳곳에는 제례 행사 때 비와 햇빛을 피할 수 있도록 천막을 치기 위한 커다란 쇠고리 ‘차환고리’. ‘차일고리’도 설치돼 있다.

종묘 정전 앞 월대

정전을 나와 조금만 이동하면 ‘영녕전’에 도착한다. 영녕전은 세종 3년에 증축된 정전의 별채 같은 곳이다. 이곳은 정전의 축소판으로 지붕을 제외한 기둥과 규모에서 조금 작다. 다만 지붕이 수평선을 이루는 정전과 달리 영녕전은 가운데 네 칸의 지붕이 양옆 건물보다 한 단계 높고 다른 신실들과 벽으로 막혀 있다.

종묘 영녕전

종묘를 방문한 홍대 건축학과 이한별(21)씨는 “최근의 건축 추세가 높게 쌓고 화려한 장식을 하는 데에 열중하는 면이 있는데 종묘를 방문해 정전을 보니 마치 높은 산만보다 들판을 바라보는 느낌을 받았고, 절제한 소박함 속에서도 아름다운 공간을 구축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종묘를 한 바퀴 돌아 나오는 데 소요된 시간은 약 50분. 종묘를 나서 바로 앞에 있는 종묘 공원을 통과하니 길 건너편으로 종묘 앞부터 충정로 대한극장까지 남과 북으로 길게 늘어선 세운상가 건물이 보였다. 낮고 절제된 아름다움을 가진 종묘 맞은 편에는 잘려나가 밑동만 남은 현대세운상가의 일부 기둥과 초라한 건물 외벽이 눈에 들어왔다.

세운상가

현대 세운상가는 오세훈 전 서울 시장 당시 추진된 ‘세운 초록띠 공원’ 사업으로 일부가 철거됐지만, 현재는 철거된 대지에 도시농업 차원의 벼가 심어져 있었다.

총 4개의 건물로 이뤄진 통칭 세운상가는 1970~80년대 산업화시대 한국 전자산업의 메카이자 서울 속의 작은 도시였다.

세운 상가가 건설되기 전 이곳은 전후 피난민의 판자촌이었다. 본격적인 개발은 1966년 고(故) 김현옥 전 서울 시장의 주도로 이뤄졌다. 고(故) 김수근 건축가가 설계한 이곳은 현대·대림·삼풍·풍전·신성·진양 6개 기업체와 개인 지주 모임 등의 분할 시공으로 1970년 초 완공됐다.

설계를 맡은 김수근은 소방서와 초등학교까지 갖춘 ‘도시 속의 작은 도시’로 세운상가 일대를 디자인했다. 그러나 당시 시(市) 재정 부족 문제로 현대, 대림, 삼풍 등 대기업에 투자를 받으면서 기존 설계안이 상당 부분 훼손됐다.

조한 홍익대 건축학과 교수는 “종묘 바로 앞에 있는 현대 시공 상가가 건물들의 무리 중 가장 김수근의 원 설계에 근접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세운상가는 주로 전자제품과 조명을 취급하는 가게로 가득차 있다. 건물을 관통하는 차도 옆 1층에 다닥다닥 즐비한 가게들을 지나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부분 부분 햇빛이 바닥까지 관통해 볕이 드는 곳을 만날 수 있다. 어둡고 침침하게 느껴질 수 있는 상가 곳곳에 햇빛을 끌어 올 수 있도록 채광에 신경을 쓴 것을 알 수 있다.

세운상가 건물 내부의 천정

건물 내부에서도 김수근이 빛을 끌어내는 데 고심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복도 양쪽에 수직으로 낸 창이나 ‘ㅁ’자 형 복도의 천정은 무심한 표정의 콘크리트 건물을 한층 산뜻하게 만들었다.

세운상가 건물 내부 복도와 난간

굵은 목재로 만든 나무 난간도 이색적이다. 이 난간이 설치된 ‘ㅁ’형 복도는 여러 영화의 촬영지로 쓰일 만큼 국내에선 보기 어려운 구조다.

계단을 따라, 혹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지금은 없어진 공중 가로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원래 디자인대로라면 세운상가 건물군(群)은 모두 공중 가로로 연결돼 있어야 하지만, 청계천 복원 사업과 ‘세운초록띠 개발 사업’등으로 인해 지금은 모두 해체됐다.

또 청계상가, 대림상가 옥상에는 한국의 색, 한국적인 것에 대해 고뇌하던 김수근의 ‘타피스트리’ 형식의 디자인도 만날 수 있다.

청계,대림상가 옥상의 김수근 작품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다시 길을 건너면 지금은 호텔로 변한 삼풍, 풍전상가 건물과 꽃시장으로 변모한 신성, 진양상가 건물을 만날 수 있다. 진양상가 위쪽에 위치한 아파트는 동남아시아에서나 볼 수 있는 노랑, 초록, 파랑, 주황 색색의 차양들과 에어컨 실외기들이 매달려 있다.

홍대 건축학과 노한수씨(25)는 “세운상가 일대는 건물의 규모와 역사적 의미로 인해 과거 시간을 그대로 품은 모습을 볼 수 있다”며 “사대문 내에서 산업화 시기의 설계 방식과 디자인을 세운 상가만큼 볼 수 있는 곳은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신성, 진양상가의 모습

조한 홍익대 건축학과 교수는 “종묘와 세운상가는 각각의 특징과 성질이 대비되는 독특한 곳”이라며 “600년과 40년의 시간을 품은 두 공간이 각각의 수평적이고 수직적인 이미지를 통해 각 시대의 건축적 특징을 대변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