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오후 충북 청원군 오창(梧倉)과학산업단지 LG화학 오창1공장. 무인 자동 설비에서 GM, 포드, 현대·기아차, 르노 등 세계적인 업체들의 전기차에 들어갈 배터리가 24시간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이 공장은 평소 기밀을 이유로 외부에 공개되지 않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최고 기밀 구역은 LG가 특허를 보유한 '스택 앤 폴딩(stack & folding)' 공정이다. 자동 기계 장치들이 A4 용지 3분의 2 크기의 배터리 11장을 책 제본을 하듯 차곡차곡 쌓고 있었다.

이 공정은 부피는 줄이면서 배터리 용량을 10% 증가시키는 동시에, 10년 이상 안정적으로 자동차에 동력을 공급할 수 있는 배터리를 만들어낸다. LG화학은 이 기술 덕분에 소니, 산요, 파나소닉 등 이 분야에서 10년 가까이 먼저 출발한 일본 업체들을 제치고 전기차 배터리 분야에서 세계 최고 기업으로 부상했다.

◇줄 잇는 글로벌 메이커 방문

LG화학의 오창공장과 대전 기술연구원은 전기차를 개발하는 전 세계 자동차 업체들 사이에 꼭 한 번 들러야 하는 '글로벌 메카'다. 이날도 럭셔리 자동차 메이커인 랜드로버·재규어의 전기차 개발담당자가 전기차 개발을 앞두고 LG화학과 협의차 방문했다.

23일 전기차 배터리를 생산하는 충북 청원군 오창읍 LG화학 오창 1공장 생산라인에서 연구원들이 전기차에 들어가는 배터리셀을 들어 보이고 있다.

글로벌 자동차 메이커들이 LG화학으로 몰리는 이유는 이 회사의 배터리가 GM 볼트와 현대차 아반떼 등 1세대 전기차에 공급돼 한 번도 사고를 내지 않았을 정도로 안정성과 기술력이 검증됐기 때문이다.

내연기관 자동차와 달리, 전기차는 원가의 25~30%를 차지하는 배터리가 차의 심장 역할을 한다. 이 때문에 글로벌 차 메이커들은 개발 단계에서부터 배터리 용량과 성능, 디자인 등을 LG화학과 사전에 협의한다. 공장 관계자는 "미국과 유럽의 유수한 자동차 업체들이 우리 공장과 연구원을 방문하고 있다"면서 "아직 한 번도 찾아오지 않은 곳은 일본 도요타와 이탈리아 피아트뿐"이라고 말했다.

오창공장에서는 최근 유례없는 항공 수송 작전이 펼쳐지기도 했다. 볼보가 서유럽 시장에서 판매 중인 전기차 V60이 기대 이상으로 팔려나가면서 배터리 주문이 폭주한 것이다. 김우연 자동차전지 생산담당 상무는 "볼보가 수송료를 부담하는 조건으로 배터리를 항공편으로 보냈다"고 말했다.

◇'패스트 팔로어'에서 '퍼스트 무버'로

LG화학의 전기차용 배터리는 우리 제조업계 역사상 최초로 세계시장을 창출해 낸 분야이다. 자동차·조선·반도체·철강 등 우리 주력산업은 선진국 기업이 만든 제품을 따라 잡아가는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로 성장해 왔다. 하지만 전기차용 배터리만큼은 우리 기업들이 '퍼스트 무버(first mover)'로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전기차용 배터리의 주류가 된 리튬이온 배터리는 1991년 일본 소니가 처음으로 만들었다. 당시엔 휴대폰이나 노트북 컴퓨터용이 주종이었다. 삼성전자LG전자 등 우리 기업은 일본 업체가 독점 생산하는 배터리를 비싸게 사와 조립을 하는 수준이었다.

LG화학은 1996년 리튬이온 배터리 자체 생산에 도전했다. 독자 기술 개발을 시작하는 한편, 일본 업체에 기술 판매 의사도 타진했다. 하지만 이미 반도체와 디스플레이에서 한국 업체에 추월당한 경험이 있는 일본 업체들은 배터리 기술 판매를 거부했다.

LG는 이에 맞서 우회로를 택했다. 일본 배터리 업체에 제조 설비와 원재료를 공급하는 일본 중소 협력 업체들과 계약을 맺고 이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얻어낸 정보를 바탕으로 리튬이온 배터리 제조 기술을 완성한 것이다. 1998년에는 양산 라인을 건설했다.

◇적자에도 지속적인 투자가 성공 요인

LG화학은 소형전지에서 쌓은 리튬이온 배터리 기술력을 바탕으로 2000년 전기차 배터리 개발에 뛰어들었다. 지금까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해 나간 것이었다. 김명환 부사장은 “도요타는 처음부터 니켈수소 전지를 전기차 배터리로 고수했지만, 우리는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리튬이온 배터리로 승부했다”고 말했다.

연구개발 착수 이후 10년간 생산품을 하나도 만들어내지 못한 상태에서도 연구·개발(R&D) 투자를 멈추지 않았다. 조갑호 전무는 “2005년엔 전지 분야에서 2000억원의 적자를 낼 정도로 위험한 투자였다”며 “그러나 이 분야가 미래 성장동력이란 확신이 있었다”고 말했다.

LG의 도전은 2009년 GM 볼트의 배터리 공급업체로 선정되면서 결실을 거뒀다.

LG화학은 현재 GM, 포드, 현대·기아차, 르노, 볼보, 중국 제일기차, 장안기차 등 세계 10여개 업체에 배터리를 공급하고 있다. 업계에선 LG화학 배터리가 메르세데스벤츠, 폴크스바겐이 개발 중인 전기차에도 공급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우연 상무는 “2016년 이후 전기차 배터리 사업은 흑자로 전환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기차(Electric Vehicle)

가솔린·디젤엔진 같은 내연기관(內燃機關) 없이 배터리를 에너지원으로 모터를 돌려 움직이는 차.

☞리튬이온전지(Li-ion battery)

리튬을 액체에 이온(ion) 상태로 녹여 이용하는 전지로, 일반 리튬전지와 달리 수차례 재충전이 가능하다. 2차전지의 일종이다. 기존 니켈수소 배터리에 비해 50% 이상 높은 에너지를 내면서도 크기는 훨씬 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