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은행의 지주회사인 산은금융지주가 올 상반기에 적자를 4336억원 냈다. 작년 상반기 5513억원 흑자와 비교하면 1년 새 1조원 가까이 실적이 악화된 것이다. 지난 2000년 외환 위기 영향으로 1조3000억여원 적자를 낸 이후 13년 만의 일이다. 산은의 대규모 적자는 대기업 구조조정의 여파다. 경기 침체로 건설, 조선, 해운 등 업종에서 부실기업이 속출하면서 산은이 산소호흡기를 대야 하는 '중환자'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산은은 올 상반기 STX그룹이 자율 협약(느슨한 워크아웃)에 들어가면서 부실 대출이 늘어나 대손충당금(대출금이 회수되지 않을 것에 대비한 자금)과 회사채 손실 등으로 8000억원이 넘는 손해를 떠안았다. 상반기 10개 은행계 금융지주회사가 적립한 대손충당금 1조2000억원의 60%가 넘는다.

산은 관계자는 16일 "산은이 부실기업 하치장처럼 됐다. 적자는 진작에 예고됐던 것이라 내부에서는 별로 놀랍게 생각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더 큰 문제는 하반기에 대기업 구조조정이 늘어나면 적자 폭이 커질 것이라는 점이다. 올해 1조원대 적자를 기록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산업은행은 자산 규모 12위의 재벌?

저금리·저성장의 골이 깊어지면서 올 상반기 다른 은행계 금융지주사들도 실적이 악화되긴 했지만, 산은의 추락은 두드러진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상반기 10개 은행지주사의 순이익은 지난해 같은 기간(3조8201억원)보다 62.3% 감소한 2조3134억원에 그쳤다. 그래도 신한금융지주는 1조722억원, KB금융지주는 6018억원 순이익을 냈다. 하나금융지주와 우리금융지주는 작년 상반기보다 순익이 70% 이상 줄었지만, 각각 순이익 3350억원과 2300억원을 냈다.

산은의 실적 악화는 대기업 구조조정마다 거의 빠짐없이 채권단에 속해 출자 전환, 신규 자금 지원 등으로 출혈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정근 고려대 교수는 "산은이 순수한 국책은행도 아니고, 그렇다고 시중은행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라 리스크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면서 "정부의 요구로 부실기업을 지원하는 경우도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다 보니 산은이 떠안고 있는 부실기업 리스트는 매년 길어지고 있다. 산은이 거느린 구조조정 대상 기업들의 자산은 총 48조5000억여원으로, 자산 기준 재계 서열로 따지면 12위에 해당할 정도다. 아시아나항공, STX조선해양 등 2개사는 산은이 주 채권 은행으로 채권단을 이끌고 자율 협약을 진행 중인데, 두 회사의 자산 규모가 19조6000억원에 이른다. STX그룹 계열사인 (주)STX, STX중공업, STX엔진 등 3개사도 자율 협약 명단에 곧 이름을 올린다.

워크아웃 기업은 9개에 이른다. 금호산업, 금호타이어, 국제종합기계, 대한조선, 21세기조선, 오리엔탈정공, 현대시멘트 등이다. 이들의 자산 합계가 8조9000억원 정도다. KDB생명(옛 금호생명)과 대우건설은 산은이 주도해서 만든 일종의 펀드가 보유하고 있다. 두 회사의 자산 규모를 합치면 20조원이다.

부실기업 지원 부담 떠안는 국책은행

산은이 최근 들어 유독 다른 시중은행들보다 부실기업의 주 채권 은행이 되는 비율이 높아진 것은 국책은행으로 '시장의 안전판' 역할을 하면서 벌어지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는 분석도 있다. 다른 은행들이 부실 징후 기업에서 대출을 회수하면, 산은이 그런 기업에 대출을 해주면서 부실기업의 주 채권 은행이 되는 경우가 많다. 산은은 국책은행이라 시중은행들처럼 비가 올 때 우산을 뺏지 못한다는 것이다. 산은 고위 관계자는 "국책은행이라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하지만, 경기 침체가 길어지면 산은이 부축해 주고 있는 부실 징후 기업들이 부실에 빠지게 돼 산은의 부담이 커진다"고 말했다.

게다가 산은은 내년 7월에 정책금융공사(정금공)와 통합하면 재정 상태가 더 악화된다. 국책은행의 역할을 넘길 예정이었던 정금공은 자산 70조원 중에 15조원이 무수익 자산(공기업 주식)이다. 산은이 정금공을 합병하면 무수익 자산에 대한 이자를 매년 6000억원 정도 부담해야 한다.

산은은 "아직까지는 부실기업 처리가 크게 부담이 되지는 않는다"는 입장이다. 지난 6월 기준으로 산은의 총자본금은 17조7000억원이다. 정부가 출자한 자본금이 9조2500억원 정도고, 지난 2001년 이후 작년까지 매년 1조원대 순익을 거둬 쌓아놓은 이익잉여금이 7조9000억원 정도다.

금융위 관계자는 "적자가 날 경우 이익잉여금으로 충당하고, 최악에는 잉여금을 모두 쓰게 되면 정부가 지원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외환 위기 당시 자본금 3조원을 단번에 까먹고, 정부의 증자금으로 연명했던 경력을 감안하면 그런 일이 또다시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박창균 중앙대 교수는 "산은이 부실기업을 떠안아 문제 생기면 정부가 자본금을 추가해야 하고, 결국 국민의 부담으로 돌아오게 된다"면서 "정부가 살릴 기업을 정해서 산은에 지원을 강요하는 상황이 더 이상 계속되면 안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