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까지만 해도 비만은 잘못된 생활 습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인식됐다. 최근에는 비만이 게임이나 약물 같은 중독 현상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과학자들은 뇌가 허기를 느껴 음식을 섭취하고, 충분한 양을 먹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과정을 밝혀냈다. 여기서 뇌가 식탐을 부르는 과정이 약물중독과 유사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에 따라 비만을 단순한 식생활 교정이 아닌 뇌 질환 치료 차원에서 다뤄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엔도르핀, 도파민이 음식 중독 이끌어

네이처지가 발간하는 과학 잡지인 사이언티픽아메리칸은 9월호에서 "비만은 호르몬 분비, 잘못된 생활 습관 등이 아닌 뇌가 잘못돼 일어난 질환이기에 뇌 치료 차원에서 비만에 접근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 연구는 미국국립보건원(NIH) 산하 약물중독연구소의 노라 볼코프(Volkow) 소장이 올 5월 국제 학술지 '신경약리학(Neuropharmacology)'에 발표한 논문,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의 폴 플레처(Fletcher) 교수가 작년 4월 국제 학술지 '네이처 리뷰 뉴로사이언스'에 발표한 논문 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과학자들이 fMRI(기능성 자기공명영상) 등의 장치로 분석했더니 사람 뇌에는 충분한 영양분을 섭취하면 음식을 그만 먹도록 명령을 내리는 회로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먼저 허기가 지면 장(腸)에서 뇌의 시상하부(hypothalamus)를 자극하는 호르몬을 분비한다. 시상하부는 음식을 먹겠다는 판단을 내리는 뇌의 부위이다. 충분한 음식을 섭취하면 장에 음식이 차고 혈관에 영양분이 공급된다. 이번엔 혈관 등에서 식욕을 억제하는 렙틴, 인슐린 같은 호르몬이 분비돼 시상하부에 전달된다. 이를 근거로 시상하부는 음식 섭취를 중단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린다. 결국 뇌의 회로만 정상적으로 작동하면 비만에 걸리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문제는 뇌를 마비시키는 '마약'이다. 배가 부른데도 과도한 음식을 섭취하는 이유는 뇌의 도파민, 엔도르핀 때문이었다.

설탕이 담뿍 든 도넛을 집어서 한 입 먹으면 뇌의 선조체가 자극을 받아 엔도르핀이 분비된다. '뇌의 모르핀'이라는 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엔도르핀이 분비되면 사람은 희열을 느낀다. 도넛의 설탕과 관련된 시각·후각·미각 정보는 뇌에서 도파민을 분비하는 곳으로 전달된다. 분비된 도파민이 뇌의 전전두엽과 편도체에 전달되면 사람은 쾌락을 느낀다.

앞서 언급된 연구에서 마약, 게임 중독자의 뇌에서 도파민이 과다 분비된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중독자는 도파민이 만든 쾌락 때문에 마약, 게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더욱 몰두한다. 결국 마약중독자처럼 비만 환자 역시 엔도르핀과 도파민이 주는 쾌감에 중독돼 과도한 설탕과 지방이 담긴 음식의 섭취를 중단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비만은 뇌 치료 차원서 접근해야

많은 영양분 중에 유독 설탕, 지방이 비만을 일으키는 주된 이유에 대해 김지은 이화여대(정신과 전문의) 뇌인지과학과 교수는 "세포의 주성분이 지방이고,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원은 설탕을 이루는 물질인 글루코스"라며 "당연히 뇌는 지방과 설탕을 좋아하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비만이 잘못된 뇌의 작동 원리에서 비롯됐다면 치료 역시 뇌 과학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김 교수는 "이미 마약 같은 약물을 복용해도 쾌락을 느끼기보다는 불쾌해지게 만드는 치료제가 개발돼 있다"면서 "비만도 설탕, 지방을 일정량 이상 섭취했을 때 희열을 느끼지 못하도록 하는 치료제를 개발하면 치료 전기가 마련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