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 지음ㅣ돌베개ㅣ360쪽ㅣ1만6000원

1987년 초봄, 아니 86년 늦겨울이라 해야 할까. 서울에 대한 내 첫 기억은 그 무렵 어느 날 마주한 강남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시작된다. 다섯 시간 가까이 버스로 국토를 종단하다시피한 장거리 여행도 처음이었거니와, 막 고등학교의 울타리를 벗어나 타지에서 유학하기 위해 집을 나선 10대에게 서울은 먼저 어떤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차에서 내려 터미널 대합실을 지나 도로변 보도로 나왔을 때, 휭- 한줄기 바람이 뺨 위로 스쳤던 순간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서울은 무엇보다, 찬 바람이었다.

공교롭게도 나와 동갑인 저자의 이 책에도 강남 고속버스터미널 이야기가 나온다. "강남 쪽에 살던 내 어린 시절에는 꼭 고속버스를 타러 가지 않더라도, 볼링장도 있고 영화관도 있어 터미널은 놀이터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내가 87년 상경했던 그 날 강남 터미널에는 그런 볼링장은 ‘없었다’. 영화관도 ‘없었다’. '놀이터 같은 곳'은 더더욱 아니었다.

똑같은 물리적 공간이, 체험하는 사람 또 그가 지나온 시간의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장소로 인식될 수도 있다는 사실. 이 책의 제목에 등장하는 '공간의 기억, 기억의 공간'이란 뜻은 이런 생활세계의 체험에 깊숙히 뿌리 내리고 있다. 건축가의 눈으로 본, 건축물에 투영된 시간과 공간의 현상학이 360쪽에 걸쳐 에세이 형식으로 펼쳐진다.

책을 관통하는 장소와 공간과 기억에 대한 저자의 예민함은 남다른 삶의 궤적에서 이미 짐작된다. "서울 도봉구 미아동에서 나고 자랐다. 10대 시절은 강남구 압구정동에서 보냈다. 20대는 홍대에 학적을 두고 낙원상가며 세운상가며, 고속버스터미널 같은 서울 구석구석을 '놀이터' 삼아 보냈다"고 책 날개에 적어놨다. 이어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10년간 건축을 공부하고 실무 경험을 쌓은 후 다시 서울로 왔다. 지금은 다시 모교에서 건축을 가르친다.

스무 꼭지의 촘촘한 글들은 서울 여기저기에 도사린 크고작은 공간, 그 속에 움튼 건축물들에 대한 사적인 탐사기이자 공적인 논의와 모색으로의 초대장이다. 저자는 '기억의 공간' 서울을 누비며 '공간의 기억'을 더듬고 풀어낸다. 홍대 앞 서교365에서 출발해, 서촌 옥류동천길, 인사동 쌈지길, 신사동 가로수길을 지나 정동길, 세운상가, 낙원상가를 거쳐 서울시 청사, 광화문 광장에 이르는 짧지 않은 여정이다.

‘공간의 기억'이라고 하면 다분히 추상적이다. 하지만 책 내용은 관념에 매몰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책의 표현을 빌면 '오랜 시간을 간직한 벽돌의 촉감, 오래된 물탱크의 물 냄새, 발아래 자그락거리는 자갈의 소리, 잘려나간 건물의 구조 같은 것들'의 연속이다. 내장된 자료 사진과 스케치들이 이해를 돕는다.

저자 자신의 과거와 현재가 오버랩되는 공간의 내력과, 더불어 교차되는 서울 곳곳의 변천사는 그것 대로 요긴한 정보이면서 맛있는 읽을거리다.

이를테면, 인사동은 조선시대만 해도 물길이었다. 원래 삼청동에서 청계천으로 흐르는 개천이던 것이 복개되면서 길을 따라 골동품점과 고서점 같은 상점들이 늘어서면서 하나의 거리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인사동의 한정식 집과 전통 찻집 한옥들이 늘어선 뒷골목은 1920~30년대에 생겨났다. 근대화와 더불어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어 주택난이 심해지자, 집장사들이 몰락한 권세가들 집을 사들여 허물고, 큰 대지를 쪼개 작은 도심형 한옥들을 지어 판 데서 유래했다.

신사동 가로수길도 20년 전에는 이름조차 없었다. "1970년대 말 새마을운동 지도자들이 자발적으로 심은 작고 앙상한 은행나무들이 길을 따라 늘어서 있는, 특별할 것이 없는 평범한 주택가 골목길이었다." 1980년대 강북 인사동의 땅값이 뛰면서 1982년 예화랑이 그리로 옮겨간 게 신호탄이었다. 다른 화랑들도 뒤따라 오고 액자 가게와 골동품점들이 생겨나면서 자연스레 화랑거리가 생겨났다.

하지만 본격적인 변화는 뜻밖에도 IMF 외환 위기가 발단이었다. 경제난에 미술품 수요가 급락하면서 화랑과 갤러리들은 자리를 떴고, 빈 공간에 디자이너숍들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외환 위기 때문에 중도 귀국한 디자이너 유학생들이 밀려들어온 것. 여기에 '은행나무 침대'로 대박을 낸 신씨네 프로덕션을 비롯한 영화사들이 들어오면서 '강남의 충무로', 나아가 '종합예술의 거리'로 커졌다.

지금은 초췌한 세운상가도 이면에는 파란만장한 서사가 숨어있다. 시작은 태평양을 장악하려는 일본의 무모한 욕망이었다. 태평양전쟁 말 일본은 연합군의 소이탄 공격에 의한 대형 화재를 걱정해 종로에서 남산 기슭까지 멀쩡한 마을을 철거했다. 남북을 가로지르는 길이 1킬로미터 폭 50미터의 공터가 생겨났다.

일본이 패망하고 6.25 후에도 방치됐던 이 개활지에 전쟁 이재민과 월남 이주민이 판잣집을 지어 살다가, 곧바로 대규모 사창가로 전락했다. 1966년 4월 서울시장으로 부임한 '불도저' 김현옥 시장이 대대적인 정비 사업에 나섰다. 종로3가에서 퇴계로3가까지 무려 1킬로미터에 이르는 대한민국 최초의 주상복합 건물 프로젝트를 맡은 책임자가 당시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부사장으로 있던 건축가 김수근이었다. '세상의 기운을 모으다'라는 뜻의 세운상가라는 이름도 김 시장 작품이었고.

북촌에 이어 요즘 새롭게 뜨는 서촌 이야기도 흥미롭다. 저자는 이 동네를 '주거학의 보고'라고 부른다. 서울 시내에서 드물게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 해방 직후, 산업화 시기를 거쳐 최근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기의 주거 유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는 이유에서다. 가령 서촌의 허름한 1층짜리 건물의 간판이나 벽을 뜯어내면 그 속에 보물처럼 한옥이 숨어 있는 경우가 다반사다.

저자 스스로 '옥류동천길'이라 이름 붙인 골목길을 따라가다 보면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목조 집장사집 한옥과 2층짜리 목조 일식가옥과 벽돌 건물, 전후 지어진 콘크리트 슬래브와 지붕이 처마처럼 튀어나온 주택과 공장 건물, 1980년대 유행한 돌출창과 유럽형 테라스, 1990년대 이후에 지어진 빌라와 다세대주택에 이르기까지, 지난 100년 주택 변천사가 슬라이드처럼 지나간다.

서촌이 지금처럼 옛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도 아이러니다.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인근까지 무장공비가 침투한 사건이 있은 후 보안을 이유로 인왕산과 북악산 입산이 금지됐다. 서촌 일대 건물도 신축은 물론 증개축까지 통제됐다. 그 덕에 서촌은 개발의 광풍을 피해 조선시대부터 이어진 오랜 도시 구조를 간직할 수 있었다니.

책 중간중간에 저자의 건축 철학이 건물의 철골 골조처럼 삐쳐 나온다. "건물을 하나 더 짓기보다 나무 하나를 더 심는 것이 '바른 건축'이라고 믿는다"는 사람. 그런 믿음은 우리 주변에 팽배한 '새것 신드롬'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진다. 가령, "주민 보상에 980억원, 공원 조성에 80억원을 들여 복원했다는 수성동 계곡은 그저 잘 정돈된 조경으로만 보일 뿐, 나에게는 별다른 감동을 주지 않는다"고 쓴다.

이유는 '시간을 망각한 공간'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세빛둥둥, 동대문디자인플라자파크 같은 수많은 전시성 사업을 혐오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장소에 내재한 시간의 가치를 망각하고, 보여주는 공간에만 집착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사람들이 아직도 북촌, 서촌, 홍대 앞길, 세운상가 주변의 미로 같은 골목길을 찾는 것은 역사적인 시간과 삶의 시간의 층층이 쌓여 있는 '시간 감동' 보고이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저자가 해석하는 가로수길의 매력도 공간에 포개진 시간의 중첩성에 있다. "40년 가까이 된 가로수와 30년 된 갤러리, 20년 된 디자이너 패션숍과 아틀리에 카페, 10년 된 와인바와 음식점 등 다양한 시간이 공존하고 그런 시간을 머금은 다양한 스케일의 공간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광화문 광장을 지금처럼 닫아 둘 게 아니라 열린 곳으로 바꿔야 한다는 제안은 꽤나 설득력이 있다. "지금 우리 곁에 있는 광화문광장은 광장은커녕 마치 '섬' 같다. 실제로 광화문광장은 양쪽 5차선으로 차들이 쌩쌩 달리는 고립된 '교통의 섬'이다. 10차선 도로를 나누는 거대한 중앙분리대라는 놀림거리가 되고 말았다. (중략) 모두 전근대적인 축선 상의 배치 때문에 생긴 결과다. (중략) 이제는 그 건물을 사용할 사람들, 그 공간에서 살아갈 사람들을 위한 고려를 어떻게 디자인에 반영할 것인가가 논쟁의 화두로 떠올라야 한다."

저자는 세종문화회관쪽 차로를 반대편으로 몰아 시민이 접근할 수 있는 진정한 광장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책을 읽고 난 후 그 앞을 지나가 보니 더더욱 일리가 있어 보였다.

이렇듯 이 책은 우리가 당연시해온 삶의 공간을 새삼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게 한다. 그 눈길 앞에서 익숙했던 도시의 풍경은 하나둘 허물을 벗고 그 속에 감춰져 있던 시간의 겹을 한꺼풀 한꺼풀 드러낸다. 공간에서 시간의 나이테를 읽어내는 시공의 고고학이다.

저자의 그런 다원적인 공간 감각이 가장 빛나는 대목은 인사동 쌈지길을 묘사할 때다.

"쌈지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면, 마치 잔칫날 북적대는 우리 집 마당을 내려다보는 것 같다가, 어느새 인사동길 옆을 걸으며 지나가는 행인들의 모습을 보고 있고, 가벼운 느낌의 시멘트 보드 바닥을 걸으며 윈도 쇼핑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다가도, 다음 코너를 돌면 풀이 무성한 어린 시절의 시골길에 와 있다. 중정을 돌며 건물 내부에서 쇼핑을 하다가, 갑자기 하늘이 열리고, 저 멀리 북악산이 눈에 들어오면 어린 시절 동네 뒷산에 오르던 기억이 떠오른다."

강남 터미널의 내 첫 기억도 벌써 20년이 훨씬 더 지났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진 서울, 그 사방의 공간을 다시 보고 숨은 시간을 더듬게 하는, 각성제 같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