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넘게 부동산 중개업소를 돌아다니다 서울 동작구에 2억5000만원짜리 전셋집을 구한 허모(39)씨는 은행에서 전세 자금 대출을 받으려다 고민에 빠졌다.
일반 전세 대출보다 금리가 0.5%포인트 정도 낮은 '목돈 안 드는 전세 대출' 상품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단골 은행 지점에 문의했는데 특약이니 뭐니 조건이 많았다. 은행 직원은 "전세 계약서를 쓸 때 집주인 동의를 얻어 '보증금 반환청구권'을 은행에 양도한다는 특약을 맺어야 한다"고 말했다. 허씨는 "집주인한테 돈 없다고 통사정해서 전세금 2000만원 깎아 겨우 전셋집을 구했는데, '특약'을 맺자고 또 아쉬운 소리를 하긴 어렵다"면서 "이자를 조금 더 내고 일반 전세 대출을 받는 게 나을 것 같다"고 말했다.
정부가 전·월세난으로 고통을 겪는 서민과 저소득층을 돕기 위해 새로운 전·월세 대출을 확대하고 있지만, 정작 대출을 취급하는 은행권과 전·월세 세입자들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목돈 안 드는 전세, 세입자도 은행도 시큰둥
지난 23일 국민·신한·우리·하나 등 6개 은행에서 '목돈 안 드는 전세 대출'이 일제히 출시됐지만, 이 대출 상품을 찾는 세입자가 얼마나 있을지는 미지수다. 세입자는 물론 상품을 파는 은행도 시큰둥하다. 집주인이 전세 계약 때 특약을 맺는다고 해서 손해 보는 일은 없다. 그러나 전셋집 품귀 현상을 겪는 현재 상황에서 집주인이 조금이라도 꺼림칙한 전세 계약을 해야 할 이유는 없기 때문에 이 대출 상품이 얼마나 팔려 나갈지 의문이다.
게다가 대출받을 수 있는 대상도 적다. A은행의 개인금융 담당자는 "부부 합산 소득 연 5000만원까지는 금리가 훨씬 낮은 국민주택기금 대출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사실상 대출 대상은 소득 5000만~6000만원 구간에 해당하는 가구뿐"이라며 "대출 건수가 좀 늘기는 하겠지만, 애초부터 대출 대상자가 많은 상품이 아니다"고 말했다. 게다가 다음 달 중 출시될 '목돈 안 드는 전세 대출 I'은 부정적인 평가가 더 많다. 이 대출은 전세금을 늘리는 경우 집주인이 본인 집을 담보로 맡기고 대출을 받은 뒤, 세입자가 대출에 대한 이자를 은행에 대신 내는 구조다. B은행 담당자는 "전세 세입자가 줄을 섰는데 어느 집 주인이 자기 집을 담보로 맡기고 대출을 받을지 의문"이라며 "취지는 좋지만 전세 시장의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금융 상품 같다"고 말했다.
◇월세 대출 늘면, 월세 자체가 올라갈 수도 있어
금융 당국이 보증부 월세 세입자를 지원하겠다며 월세 대출 상품을 확대하도록 한 것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신한·우리은행의 월세 대출 상품이 4월에 출시된 이후 전체 대출 건수가 10건 정도에 불과하자, 금융 당국은 대출 한도를 확대(3000만원→5000만원)하고, 대출 대상도 확대(신용등급 6등급→8 혹은 9등급)하기로 했다. 외환·기업·하나은행도 보증회사의 보증을 받아 마이너스 통장 형식의 월세 대출 상품을 조만간 출시할 계획이다.
캐피탈·저축은행에서 돈을 빌리던 월세 세입자들이 싼 금리에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박원갑 국민은행 부동산전문위원은 "전세 대출이 늘어나 전세금이 오른 것처럼, 월세 대출이 늘면 월세가 상승할 수도 있다"며 "월세 대출 확대는 현재 가격이 하락 안정세를 보이는 월세 시장에 독(毒)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전·월세 대출 확대는 대증 요법에 불과, 매매 수요 늘려야
정부는 오는 28일 전·월세 종합대책을 발표할 예정이지만, 임시방편일 뿐 근본적인 대책이 나오기는 힘들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국민주택기금을 이용한 마이너스 통장 방식의 전세 대출 상품을 새로 도입하고, 월세 소득공제 확대,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시행하는 전세 임대주택을 9월 이사철에 맞춰 조기 공급하는 등의 대책도 마련 중이다. 또 전세금이 5억~6억원에 이르는 고액 전세 세입자는 매매 수요로 전환될 수 있도록 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주택시장 전문가와 금융권 관계자들은 정부가 전·월세 대책을 세울 때 저리의 전·월세 대출 상품을 지속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남희용 주택산업연구원장은 "당장 급한 불을 끄기 위해 저리(低利)의 전·월세 대출을 확대하는 것은 전·월세 시장을 교란하고 가계 부채를 늘리는 문제가 있다"며 "근본적으로 임대 수요를 매매 수요로 전환시키는 대책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