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노가미 다카시 지음 ㅣ 임재덕 옮김 ㅣ 성안당 ㅣ 307쪽 ㅣ 1만3800원

일본 전자·반도체 대붕괴의 교훈

2012년 2월 27일. 일본의 대표적인 반도체 업체인 엘피다가 도산하면서 일본 사회가 충격에 빠졌다. 일본 정부는 세계 D램(RAM)시장 선두를 달리던 삼성전자(005930)와 하이닉스에 대항해 엘피다를 살리기 위해 막대한 공적자금을 쏟아부었지만 결국 엘피다는 도산하고 말았다.

유키오 사카모토 당시 엘피다 사장은 기자회견에서 'D램 가격의 하락, 엔고 현상, 동일본 대지진, 태국 홍수'등을 파산 배경으로 언급했다. 일본 언론들은 한국 업체들의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엘피다가 도산했다고 분석했다. 그들은 모두 엘피다의 파산 원인을 외부에서 찾고 있었다.

'일본 전자·반도체 대붕괴의 교훈'를 쓴 저자 유노가미 다카시는 "수익성을 개선하지 못한 엘피다에서 도산 원인을 찾지 않고 외부 탓만 했다"며 사카모토 당시 사장을 냉철하게 비판했다. 저자에 따르면 엘피다는 D램 가격의 하락을 예측하지 못하고 과잉 기술로 과잉 품질의 비싼 D램 제조에만 매달리다가 수익률 개선에 실패했다.

저자는 이같은 엘피다의 실패를 일본 반도체 산업의 '기술에 대한 집착'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일본 반도체 업체들은 수익률이 나쁘기 때문에 호황기에 충분히 이익을 내지 못하고, 불황때는 대규모 적자를 낸다. 이런 근본적인 원인은 기술의 극한을 추구해 철저한 고품질의 반도체를 제조하는 방법으로 성공을 거두었던 1980년대로 거슬로 올라간다. 그때 정착한 '고품질' 기술 문화가 결국 일본 반도체 업체들의 체질을 약하게 만든 것이다.

소니, 샤프, 파나소닉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한 때 혁신의 대명사로 인식됐던 소니의 직원과 대화를 공개하면서 일본 국민 전체가 '혁신(이노베이션)'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따끔하게 일침을 놓는다. 경제학자 슘페터는 혁신을 두고 '새로운 시장을 창조해 폭발적으로 보급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게임업체 닌텐도는 'Wii'을 만들어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님도 모두 함께 누릴 수 있는 게임을 만들어 지금까지 타깃층이 아니었던 여성과 고령자층을 섭렵했다. 이것이 혁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소니의 사원은 저자와의 대화에서 '혁신은 기술 진화' 혹은 '기술의 혁신'이라고 언급한다. 저자는 이를 그릇된 생각이라고 다그치며 '"기술 혁신'이라는 말로는 고성능의 기술을 개발한다는 것 밖에 연상할 수 없다"며 "혁신에 대한 잘못된 개념이 일본인들의 머릿속에 박혀버렸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일본 전자 산업이 다시 살아나려면 실패를 인정하고 60세 이상의 임원은 후진 양성을 위해 물러나야 한다고 직격탄을 던진다. 큰 폭의 적자를 내거나 실적이 침체될 경우에도 임원들이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한다고 서슴없이 말하며 혁신의 개념을 다시 정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책에서 여러 번 삼성전자와 일본 기업의 마케팅을 비교한다. 저자는 "삼성전자는 팔리는 것을 만들기 위해 마케팅에 나선다"며 삼성전자가 인도서 판매하는 가전제품을 예로 든다. 인도 사람들이 크리켓 경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TV를 볼 때 어느 채널을 보든 항상 크리켓 경기 현황을 스크린 한 쪽에 띄워준다는 점, 도둑들이 많기 때문에 냉장고 문짝에도 자물쇠를 달아놓았다는 점 등을 언급하며 일본 기업이 '만든 것을 파는 마케팅'에서 벗어나 '팔리는 것을 만들기 위한 마케팅'을 해야 한다고 설득한다.

저자는 히타치제작소, 엘피다메모리를 거치면서 약 16년동안 반도체 미세가공기술 개발에 종사한 공학박사다. 그는 일본 반도체산업잡지 '전자저널' 등에 집필하면서 일본 반도체업체들의 치부를 맹공략했다.

'일본 전자·반도체 대붕괴의 교훈'은 전문 지식이 없다면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소니, 엘피다, NEC, 파나소닉 등 일본 주요 IT업체들의 수익률, 매출, 제품 전략과 시장 상황을 숫자와 그래프로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일본 반도체 업계를 비판적으로 분석한 책이다. 기존에 언론에서 깊게 다루지 못했던 저자의 반성적, 성찰적인 시각은 이 업계의 리더들이라면 한번쯤 새겨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