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 수요가 크게 늘면서 전세금이 급등세를 보이자 금융 당국이 전세 대출 한도를 늘리기로 했다. 주택 거래를 늘리는 근본적인 처방은 뒷전이고, 전세금이 오르니 대출 한도를 높여주면 그만이라는 식이다.
은행들은 일제히 이번 주부터 전세자금 대출 한도를 대폭 확대키로 했다. 하나은행과 농협은행은 주택금융공사가 보증하는 일반 전세자금 대출한도를 이르면 19일부터 1억6600만원에서 2억2200만원으로 확대한다. 신한·우리·국민·기업은행도 23일부터 한도를 늘릴 계획이다. 가구별 소득에 따라 결정되는 전세 대출 한도도 함께 증액된다. 그동안은 주택금융공사가 연소득의 1.5~3배까지 보증서를 발급해줬는데, 2.5~4배까지 발급해 주기로 한 데 따른 것이다. 오는 23일부터는 국토교통부의 방침에 따라 은행들이 '목돈 안 드는 전세 대출' 상품도 선을 보이게 된다.
이처럼 전세 대출을 늘려주면서 가뜩이나 집값이 오르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고 내 집 마련을 늦추는 중산층들이 전셋집에 눌러앉게 되면서 전세난이 갈수록 심해지는 형편이다. 전세 대출이 쉬워지면서 전세금 상승을 부추기는 부작용까지 우려되고 있다. 남희용 주택산업연구원장은 "정부가 눈앞의 전세난을 해결하기 위해 주택금융공사 보증 등을 통해 전세 자금을 집중적으로 공급할 경우 전세금이 더욱 빠른 속도로 오르는 부작용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전세 대출 잔액 규모, 2년 반 만에 5배 급증
다음 달 전세 계약을 갱신하는 전모(46)씨는 집주인으로부터 전세보증금을 2억5000만원에서 5000만원 올리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전씨는 "2년 전에도 6000만원이나 전세금을 올렸는데 너무하다"고 했지만, 집주인은 "요즘은 은행에서 전세 대출 쉽게 해준다는데 알아서 하라"고 말을 잘랐다. 전씨는 "집주인 말대로 은행 대출을 받을 생각"이라며 "전세 대출이 늘어나는 걸 믿고 보증금을 올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실제로 은행의 전세 대출 규모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국민·신한·우리·하나·농협 등 5개 시중은행의 전세자금 대출 잔액 규모는 지난 6월 말 기준으로 9조8800억원에 달한다. 2010년 말 2조433억원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5배 가까이 급증했다.
하나은행과 농협은행의 전세대출 잔액은 2010년 말에 비해 무려 10배가량 급증했다. 금융권에선 주택담보로 빌려간 전세 자금과 신용대출을 통해 나간 전세대출을 비롯해 캐피탈과 저축은행 등 2금융권 전세 대출까지 합치면 50조원가량이 전세 자금으로 시중에 풀려 있을 것으로 추산한다. 한 은행 개인대출 담당자는 "가을 이사철을 앞두고 전세대출 수요가 늘고 있는 데다 전세 대출 한도까지 증액돼 올가을 전세 대출 규모는 사상 최대치를 기록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전세 대출 증가로 부동산 시장 왜곡돼, 주택 매매 더 위축
이같은 전세 대출 급증이 주택 시장 정상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과거에는 전세 대출이 기본적으로 신용대출이어서 금리가 높아 전세 세입자들이 전세 대출을 기피했다. 그러나 금융당국이 공기업인 주택금융공사를 통해 보증서를 발급하면서 금리가 과거 8~9% 수준에서 주택담보 대출 금리 수준인 4% 안팎으로 떨어졌다.
주택금융공사는 보증서를 발급할 때 주택 가격이나 규모, 소득 수준 등을 고려하지 않고 사실상 모든 전세 세입자에게 보증서를 발급해 준다. 집값과 전세금이 비싼 서울 강남 3개구(강남·서초·송파)에 살면서 가구의 1년 소득이 1억~2억원씩 되더라도 전세 대출을 받을 수 있다. 전세금이 5억~6억원이 넘는 고가 전세 세입자가 정부가 지원하는 보증서를 발급받아 전세금을 일부 충당할 수 있다.
한 시중은행 주택 대출 담당자는 "요즘처럼 전세금만 급등하면 전세금 대출받을 바에야 차라리 집을 사겠다고 돌아서야 할 사람이 나오기 마련인데, 요즘은 무조건 전셋집에 살겠다고 전세 대출을 받아 간다"고 말했다.
이러다 보니 전셋집은 공급 부족 상태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전세 대출이 저리(低利)에 대규모로 공급되면서 주택 매매 수요자로 돌아서야 할 고소득 전세 세입자까지 전셋집에 눌러 살게 되고, 전세난은 갈수록 심해지는 형편이다.
박재룡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고액 전세 세입자는 집을 살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선택한 것이니 주택금융공사 등이 전세 대출에 보증을 서 줄 필요가 없다"며 "금융당국의 전세 대책은 주거 복지 차원에서 저소득층과 서민층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