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북쪽 한강변 성산대교와 가양대교 사이 지역은 전 국민을 들썩이게 한 '2002 FIFA 대한민국·일본 월드컵' 이전에는 버려진 땅이나 다름없었다. 1949년 서울시에 편입됐고, 현재 지명인 상암동이란 이름은 1950년에 얻었지만, 1978년부터 1993년까지 약 15년간 9200만톤의 쓰레기가 매립된 난지도와 인접해 이른바 기피(忌避) 지역이었다.

현재 이 지역은 2002년을 기점으로 서울 송파구 방이동에 있는 '올림픽공원'의 2.4배에 이르는 347만1090㎡의 서울 최대의 생태공원인 '월드컵공원'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서울 마포구청을 기준으로 서측의 '서울월드컵경기장'은 수려한 디자인과 규모 면에서 이 공원의 랜드마크다.

서울월드컵경기장은 한국의 대표 건축가로 손꼽히는 류춘수(67)의 작품이다. 한국 현대건축의 지평을 연 고(故) 김수근의 제자로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을 설계한 바 있는 류춘수는 '축구 경기장은 타원 형태여야 한다'는 통념을 깨고 8각형 형태 전통 모반을 연상케 하는 경기장과 방패연을 닮은 지붕으로 한국미를 살렸다는 평을 받았다.

류춘수는 1946년 경북 봉화가 고향이다. 1970년 한양대 건축학과, 1985년 서울대 환경대학원 조경학과를 졸업했으며, 1974년부터 1986년 김수근이 타계할 때까지 공간 건축에서 실무를 쌓았다. 1986년 이공(異空) 건축을 세웠고, 현재까지 27년간 붓을 놓지 않은 건축 원로다.

서울월드컵경기장.

◆ '2002 한·일 월드컵'의 얼굴, 서울월드컵경기장

서울월드컵경기장은 설계 입찰이 있었던 1998년 당시 국내 대형 건설회사가 모두 달라붙을 만큼 상징성이나 규모 면에서 최고의 인기 프로젝트였다.

현대·삼성물산·대림·포스코 등 각 대기업이 대형 설계업체를 선정해 입찰에 참여했던 이 프로젝트는 이례적으로 삼성그룹 내에서도 말단 계열사였던 삼성엔지니어링과 류춘수의 이공 건축이 수주를 따냈다.

당시 서울시 월드컵 주경기장건설단장을 맡았던 진철훈 전 한국시설안전공단 이사장은 "기업 규모를 따지기보다 설계의 내실을 중요시했다"며 "설계 내용을 중심으로 심사했고, 삼성엔지니어링 등 중견·중소기업이 모인 컨소시엄을 선정했다"고 말했다.

2001년 11월 개장한 서울월드컵경기장은 소반, 방패연, 황포돛배의 콘셉트로 이뤄진 건축물이다. 류춘수는 경기장은 기본적으로 '담음과 띄움'의 개념을 구현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서울월드컵경기장 내부 전경.

경기장을 하늘 위에서 바라보면 사각형의 방패연을, 측면에서 바라보면 거대한 원통형 기둥으로 돛을 단 배를 연상시킨다. 경기장 내부는 보통의 원형 경기장과 달리 주요 관중석을 직선으로 배치하고, 모서리를 두 번씩 돌아가게 했다. 경기장 내부를 보면 전통 모반 모양의 팔각형이다.

류춘수는 "경기장을 사용하는 선수, 관객의 움직임과 FIFA 규정을 지키면서도 한국적인 심볼(symbol)이 드러나도록 설계했다"며 "특히 한 달 동안 진행되는 월드컵이 끝난 이후 긴 세월 동안 이 지역의 랜드마크가 될 경기장을 어떻게 시민이 활용할 수 있는가에 가장 큰 초점이 맞춘 작업"이라고 말했다.

실제 이 경기장은 국제 공인 축구 경기를 거의 전담하고 있으며, 초대형 콘서트 및 오디션 행사장 등 문화행사가 수시로 열리며 공공 건축물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박혜영 월드컵경기장 관리자는 "레저-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 인근 아파트 주민이 많이 찾는다"며 "특히 경기장 3층은 항시 개방돼 전망대 겸 산책 코스로도 애용되고 있다"고 말했다.

◆ 18년 된 서울 역삼동 명품 호텔, '리츠칼튼'

서울 강남구 역삼동 지하철 9호선 신논현역 4번 출구로 나오면 류춘수가 1989년 43세 때 설계한 '리츠칼튼' 호텔이 나온다. 1995년 2월 문을 연 이 호텔은 지하 7층~지상 18층 규모로 객실 수가 375개인 특1급 호텔이다.

본래 이 건물은 200실 규모의 남서울 호텔로 1987년 건축주가 호텔을 인수하면서 대대적인 리모델링이 이뤄졌다. 당시 설계자는 류춘수가 아니었지만, 건축주가 지명현상설계에서 다른 건축가를 고른 이후 1년 뒤 다시 류춘수를 찾으면서 설계가 재개됐다.

리츠칼튼 호텔 전경.

이 건물은 외관상 다소 평범해 보이지만, 건축하기에 대지 조건이 좋지 않아 건축가의 고민이 많이 들어간 작품이다. 대지 앞을 지나는 봉은사로(路)의 오르막과 기존 건물과 증축 대상지의 고저(高低) 차가 문제였다.

류춘수는 기존 건물의 기계실이 있던 전면부를 과감하게 도로 앞까지 걷어내고, 호텔 로비를 배치했다. 호텔 전면에서 바라보면 다소 답답했던 인상을 지우고, 골목 안을 돌아들어 가는 출입로를 만들면서 특급호텔의 비밀스런 분위기를 연출했다.

건물 조형적인 측면에서도 장식적인 측면을 배제하고, 구조와 기능에 따른 소박 하면서도 깔끔한 디자인을 선보였다.

이공 건축 관계자는 "국내에선 북향인 건물은 정면에 그림자를 받을 수 없어 빛과 형태에 의한 조형 효과가 반감된다"며 "신관을 계단형으로 구성해 조형성을 확보하면서도 기능적으로는 스위트룸의 테라스를 조성할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는 "각 층의 스위트룸을 계단식 테라스로 처리해 경사진 대지의 조건을 형태적으로 구현했다"고 말했다.

리츠칼튼 호텔 정문.

준공 당시부터 강남권 특급호텔로 관심을 끌었던 리츠칼튼 호텔은 준공 시점인 1995년 한국건축문화대상을 받았다.

◆ 류춘수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 한계령 휴게소

강원 양양군 서면 오색리의 설악산 '한계령 휴게소'는 해발 1004m의 한계령 정상에 있는 건물로 1979년 류춘수가 공간 건축에서 일할 당시 맡은 프로젝트다. 고산 지대의 돌과 나무로 천혜의 풍광을 자랑하는 한계령의 깎아지는 듯한 비탈에 세워졌다.

이 휴게소의 기본 콘셉트는 '산과 어울리는 집'이다. 건물 정면의 외관을 보면 마치 모자를 푹 눌러쓴 것처럼 지붕이 아래쪽으로 깊게 내려와 있다. 이 때문에 멀리서 바라보면 휴게소 내부가 잘 보이지 않아 경관을 해치지 않는다.

한계령 휴게소 전경.

산의 품에 안긴듯한 인상의 이 건물은 40도를 넘는 경사에 맞게 건물 기둥의 길이를 모두 달리했다. 또 눈과 비가 수시로 들이치는 자연환경적인 측면을 고려해 단순 목재가 아니라 철골과 목재의 합성구조로 건물을 세웠다. 자연환경과 어울리면서도 견고하고 세밀한 설계가 돋보이는 한계령 휴게소는 1983년 한국건축가협회상을 수상작이다.

류춘수는 "건물 어디에서나 바깥을 감상할 수 있도록 테라스를 넓히고, 내부 공간의 높이를 각각 다르게 조절하면서도 실제 이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불편을 겪지 않도록 최대한 디테일을 살려 설계했다"며 "서울월드컵경기장보다 애착이 가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한계령 휴게소는 현재 본 기능을 넘어 관광 명소가 됐다. 한계령을 찾은 이들의 모임 장소이자 포토 존(photo-zone) 역할을 하고 있다.

김현우 한계령 휴게소 소장은 "광고 촬영이 잦을 정도로 한계령 풍경에 잘 어울리는 건물"이라며 "밖에서 보면 층고가 높은 오두막 같지만, 내부는 이리저리 이어지는 계단으로 미로 같아서 아기자기한 맛이 살아있는 건물"이라고 말했다.

한계령 휴게소 내부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