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재산이 29만원밖에 없다'던 전두환 전 대통령의 일가에서 수백점의 미술품이 발견됐다. 비밀 창고까지 지어가며 그림, 도자기 등 각종 미술품을 쌓아놓은 것은 비자금을 은닉하기 위한 목적일 것이란 관측이 높다.
고가 미술품은 거래가 잘 포착되지 않고, 거래된다 하더라도 비공개적으로 이뤄진다. 또 동일한 물건이 없기 때문에 적정 가격을 책정하기도 어렵다. 만약 개인끼리 서로 합의한 가격에 현금으로 미술품을 사고판다면 값이 제아무리 나가더라도 과세 당국의 추적을 피할 수 있다. 고가 미술품이 부유층의 탈세 전유물이 된 것은 이렇게 과세망을 완전히 비켜갈 수 있기 때문이다.
◆ 미술품, 대형 비자금 사건 단골 주연
미술품은 각종 비자금 의혹 사건의 단골 주연이다. 2008년 삼성그룹 특검에서는 삼성이 비자금으로 해외 미술품 경매에서 고가품을 사들였다는 의혹을 받았다. 감정가 86억원 상당인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작품 '행복한 눈물'과 같은 고가 미술품을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한 갤러리를 통해 매입해 비자금을 세탁했다는 것이었다.
지난해 부실 저축은행 비리 사건에서도 미술품이 등장했다. 김찬경 전 미래저축은행 회장은 저축은행 구조조정을 앞두고 고가 미술품을 로비에 사용했다. 김 회장은 파블로 피카소 등 거장의 작품을 다수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부산저축은행의 계열사와 경영진은 2000억원 이상으로 추정되는 미술품을 보유한 것으로 드러났다.
최근 이재현 CJ그룹 회장도 고가의 미술품 매입 과정에서 세금을 탈루한 정황이 포착됐다. 6200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것으로 알려진 이 회장은 해외 유명 작가의 미술품 매입에 1000억원을 넘게 사용한 것으로 검찰 조사 결과 확인됐다. 이 회장은 데미안 허스트 등 글로벌 미술 시장에서 곧장 거래가 가능한 인기 작가의 작품을 다수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 거래 자체가 파악 불가능 … 취등록세부터 양도-상속ㆍ증여세 전부 피할 수 있어
미술품은 주식이나 부동산 등과 비교해 세금을 피할 수 있는 여지가 매우 크다. 예를 들면 부동산은 사고팔 때 취득ㆍ등록세를, 보유하면 재산세를, 팔아서 차익을 남기면 양도소득세를, 자식에게 물려주려면 상속ㆍ증여세를 내야 한다. 그러나 미술품은 부동산ㆍ자동차ㆍ선박ㆍ항공기 처럼 등기 등록을 필요로하는 공적 등록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취득세 부과 근거가 없다. 정확한 보유 규모를 파악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재산세도 부과되지 않는다. 거래 자체가 포착되지 않으면 양도소득세와 상속ㆍ증여세를 피할 수 있다.
정부는 올해부터 미술품 매매 차익에 대해 기타 소득세를 부과하고 있지만 실효성이 별로 없다는 지적을 받는다. 숨진 작가의 6000만원 이상 작품에 대해 매매 차익의 최대 22%까지 세금을 내야 하지만 차액의 90%까지를 필요 경비로 인정해 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1000만원의 차익이 생겼다면 보관료 등 각종 필요 경비를 900만원까지 제해주고 100만원의 22%인 22만원만 세금을 내면 된다. 이러한 법을 적용하더라도 실제 과세 대상은 전체 미술품 거래 규모의 1~2%에 불과한 것으로 파악된다. 김완석 강남대 석좌교수는 "현재 미술품 거래와 관련한 과세 장치가 마련돼 있다해도 적발이 쉽지 않아 세금을 물리기 어려운 실정"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소수만 접근이 가능한 고가 미술품은 부유층에겐 매력적인 세금 탈루 대상일 수밖에 없다. 유일무이하다는 미술품의 특성상 공정 가격 책정이 불가능한데다 가격 변동도 예상하기 어렵기 때문에 거래 당사자 간 가격을 짜맞출 수 있다. 또 거래 단계에서부터 과세망을 벗어났기 때문에 상속이 이뤄지더라도 과세당국이 이를 파악할리 만무하다. 이준봉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법인이라면 모를까 개인이 서로 협조해 암묵적으로 가격을 형성하고 나서 현금으로 미술품을 거래한다면 추적이 완전히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 경매시장 활성화하고 거래 양성화 압력 높여야
미술품 거래가 음성화돼 있다 보니 현재로선 갤러리의 미술품 거래 수수료, 미술품 감정평가사의 평가 수수료 등 간접 소득을 역추적해 미술품 거래에 대한 세금 탈루를 파악하고 있다. 또 미술품 감정 평가를 의뢰한 사람이 임대료를 지급한 것으로 파악됐을 때, 임대료 보관 물품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으면 미술품 은닉을 염두에 두고 수색을 벌이기도 한다. 박훈 서울시립대 교수는 "이러한 노력은 근본적으로 미술품 거래를 양성화하도록 압력을 가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세제 전문가들은 미술품 거래를 양지로 끌어내려면 근본적으로 경매시장이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준봉 교수는 "미술품 거래는 전반적인 사회 투명도와도 연관이 깊다"며 "외국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경매가 존재하는데 우리나라엔 경매시장이 별로 없어 음성, 변칙적 거래가 많다"고 지적했다. 또 "우리나라 미술 시장의 규모가 크지 않은 것은 경매시장 활성화의 걸림돌"이라고 말했다.
거래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해 미술품 등기 제도를 도입하는 것도 방안으로 거론된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미술품이 등기되면 매매 차익에 대한 과세가 수월해지겠지만 미술계에서 미술 발전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