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현대카드는 변신 중이다. 라이프스타일에 따라 골라 쓰는 각종 알파벳 카드를 내놓으면서 양쪽 꼬리를 넓게 벌려 외연을 확장하는 '롱테일(longtail) 법칙'을 버리고 있다. 지난 10년간 이 전략으로 시장점유율을 1.8%에서 14.5%로 끌어올리고, 6000억원 적자를 보던 회사를 2000억원 흑자 회사로 탈바꿈했지만, 이 성공 모델을 과감히 폐기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카드는 지난달 100개에 가깝던 신용카드 상품을 7개로 확 줄이겠다고 발표하고 이를 바로 실행했다. 쉽게 말해 돈이 되는 카드만 남기고, 혜택도 보너스 적립과 캐시백으로 극단적으로 단순화하겠다는 것이다. 현대카드는 이를 '제2장(chapter 2)'이라고 부르며 새로운 10년을 열기 위해 과거 10년의 성공을 버린다고 했다. 잘나가던 현대카드가 왜 이런 극적인 전략 선회를 한 것일까. 2년 만에 정식 언론 인터뷰에 응한 정태영 사장은 "위기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성공 모델을 버리다

―지금 카드업계는 위기인가.

"위기다. 수익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복사용지 적게 쓰고 에어컨을 꺼서 만회할 수 있는 수준을 이미 넘었다. 가맹점 수수료율이 인하되면서, 신용판매가 기본인 카드업의 정의 자체가 바뀌는 상황도 오고 있다. 카드사들이 현금서비스나 카드론 같은 대출서비스에 치중하는 '포트폴리오 왜곡'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이게 자극제가 됐다. 이 상황에서 우리가 뭘 생각해야 할까 고민했다."

―그래도 이익은 나고 있지 않은가.

"금융은 ROE(투입한 자본이 얼마만큼 돈을 벌었는지 보는 지표)가 문제지 흑자, 적자는 문제가 아니다. 그게 심지어 적자라면 어마어마한 사태고. ROE가 어느 정도 아래로 떨어지면 신용등급이 떨어지고 펀딩(자금조달)이 막힌다. 남의 돈 가져오는 게 금융이니까, (ROE가) 일정 이하로 가면 위기다. 펀딩 막히면서 동맥경화가 오니까."

정태영 현대카드 사장은 2년 만에 가진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현재 카드업계는 위기이고, 현대카드는 내실을 다지는 전략을 택했다”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이성적인 좌뇌형 경영만으로는 안 되고, 직관적인 우뇌형 마케팅이 결합되어야 재밌어진다”며 탁월한 마케팅 전략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그럼 현대카드도 위기인가?

"현대카드도 위기다. 카드업계 전반적으로 그렇지만, 남들도 그렇다고 해서 위안을 삼을 것은 아닌 것 같다. 건설업계가 다 불황이라고 해서 한 건설사가 "그래 다 같이 위기니까 괜찮아"라고 생각하지는 않지 않은가."

―그래서 현대카드의 '챕터2'를 선언한 것인가.

"그렇다. 경험과 과학적 분석을 통해서 확실히 방향이 잡혔다."

―챕터2가 무엇인가.

"기존 모델을 '현대카드 챕터 1'으로, 새 모델을 '현대카드 챕터 2'라고 이름 붙여 봤다. 챕터 2에선 롱테일(longtail·다품종 소량생산)이 사라진다. 기존에 난립한 카드를 정리해 소비자들이 쓰지도 않는 카드에 들어가는 비용을 없앴다. 고객이 꼭 쓰고자 하는 카드 한 장만 선택하게 하면 카드 모집인에게 들어가는 비용을 아낄 수 있다."

―업계에서는 현대카드가 성장을 포기한 것이 아니냐는 시각이 있다.

"성장을 포기한 게 아니다. 다만 의미 없는 성장을 안 하겠다는 것이다. 우리 시장점유율이 4~5%였으면 이런 얘기 못할 것이다. 현대카드의 시장점유율은 14.5%이다. 내실을 다지는 옵션을 행사할 수 있는 덩치다."

―카드 종류를 줄이면, 소비자의 다양한 욕구를 반영하는 데 어려움을 겪지 않을까.

"예전엔 병원, 쇼핑 등 개인의 라이프스타일에 따라 카드를 나눴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병원 가는 사람 따로 있고 쇼핑 가는 사람 따로 있나. 고객은 다 하고 싶다. '당신이 이런 삶을 살고 싶으면 이 카드를 쓰세요'라고 하는 건, '기계적 선택권'에 불과하다. 포인트를 받거나 결제금액을 할인받는 것(캐시백) 중에서 선택하도록 하면 소비자의 모든 욕구를 반영할 수 있다."

(정 사장이 갑자기 의자에서 일어나, 스위치를 눌러 방의 불을 껐다가 켰다.) 이 방에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전자제품은 바로 저 스위치이다. 그런데 이젠 너무 많은 기능을 달고 복잡해져서, 어떤 호텔방에 들어가면 불 켜고 끄기조차 어렵다. '단순화'가 가장 중요한 모토이다. 세상이 자꾸만 자기중심적으로 기능을 더 탑재하려 한다. 휴대폰도, 시계도 다 복잡해졌다. 이제 사람들이 한 번 반발할 것 같다. '난 네가 주어진 임무만 충실히 해주면 참 좋겠어'라고. 사람들은 앞으로 다시 단순함에 이끌릴 것이다."

―다른 카드사들이 따라올까.

" 7월 한 달 동안에 20만 장 가까이 발급될 것으로 보고 있다. 다른 카드사들이 따라오는 건 시간문제라고 보고 있다. 두 달 아니면 석 달쯤."

◇금융사 해외 진출의 해법을 찾다

―당신은 현대캐피탈의 미국 법인인 현대캐피탈아메리카(HCA) 이사회 의장도 맡고 있다. 미국 사업 잘되고 있나.

"지난해 한국 11개 시중 은행이 한국 밖에서 번 돈이 8000억원 정도이다. 그런데 HCA는 올해 세전 경상이익이 5000억원 넘을 것 같다. 매년 실적이 목표 대비 20~30%씩 상회하고 있다. 2년 뒤부턴 해외에서 버는 돈이 국내에서 버는 돈보다 더 많을 것이다. 시중 은행들이 하지 못한 외국 진출을 의미 있게 하는 첫 번째 금융기관이 될 것으로 본다."

―HCA가 잘나가는 것은 결국 현대자동차라는 캡티브 마켓(captive market·계열사 간 내부 시장)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물론 그렇다. 하지만 한국처럼 금융이 후발주자일 때는 '프로덕트 라인'을 타고 들어가는 게 더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영국에도 진출해 있다. 스페인 최대 은행인 산탄데르와 합작 법인도 세웠다. 현대카드는 국내에서 가장 글로벌화된 금융회사라고 자부한다."

―현재 국회에선 금융회사 상근임원 겸직 금지를 골자로 하는 금융회사 지배구조 개선에 관한 법률안이 논의 중이다. 이 법안이 통과될 경우, 문제가 되는 경우는 현대카드와 현대캐피탈, 현대커머셜 등 3곳의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당신이 유일하다.

"수신(예금)과 여신(대출)을 함께 해주는 은행과 보험은 (겸직이) 문제가 되겠지만, 우리 같은 여신전문금융회사의 겸직을 왜 금지하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통과되면 법을 따르겠다."

[포화상태 보험에 뛰어든 이유]
"블루오션은 레드오션 속에 있는 법"

변하지 않는 시장, 변화 필요
보험 공부 많이 했는데… 과외 받아도 약관 이해안가, 고객들은 얼마나 답답할까

정태영 사장은 가장 최근에 포화 상태라고 평가받는 보험업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는 "정말 몇 개 안 남은 블루오션"이라며 눈을 반짝였다.

―지난 2월 녹십자생명을 인수하고 '현대라이프 제로'라는 보험을 출시하며 보험업계에도 진출했다. 보험업을 왜 유망하다고 보나.

"오랫동안 변하지 않았으니까."

―무슨 뜻인가.

"나더러 보험 같은 레드오션(경쟁자가 많은 시장)에 뒤늦게 들어갔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본연적 블루오션은 신발도 전화기도 없는 외계인을 찾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산업이건 쭉 치고 올라가면 플래토(plateau·안정 상태) 현상에 이르게 된다. 이때가 바로 블루오션이다. 정체돼 있으니 신규 진입자가 할 일이 많은 것이다. 이미 시장 참여자들이 꽉 차 있으면서도 몇 년간 큰 변화가 없었던 보험이야말로 금융에서 몇 개 안 남은 블루오션이다."

― 어떻게 차별화할 예정인가.

"솔직히 보험 공부를 많이 했다. 담당 중역들한테 일 대 일 과외도 받았다. 그런데 이해를 못 하겠더라. 설계사한테 짧은 설명을 듣는 고객들은 더할 것이다. 이게 보험 민원의 시작이라고 봤다. 그래서 우리가 이해하는 것만 팔기로 했다. 현대라이프 제로는 '보험료를 내고 20년 내 사망하면 보험금을 준다'는 단순한 상품 설명으로 소문을 타고 있다. 출시 5개월 만에 5만건 넘게 판매됐다."

[고객 욕설전화에 강경대응]
"甲이건 乙이건 육두문자 하면 게임 끝"

―'포스코 라면 상무 사건'을 계기로 블랙컨슈머에 가장 확실하게 대응하고 있다. 콜센터에 전화해 직원에게 욕설이나 성희롱 발언을 하는 손님을 상대로 먼저 전화를 끊을 수 있도록 조치했다. 다른 회사는 상상하기 어렵다.

"갑이든 을이든 육두문자가 나오면 게임 끝이다. 그것을 받아주는 게 좋겠다, 아니다가 왜 비즈니스적 판단이 돼야 하는가. 미국에서 회사가 이런 일을 참으라고 하면 어마어마한 소송감이다. 당연한 걸 파격이라고 하는 뉴스 자체가 내겐 파격적이었다."

● 정태영은 누구
내가 '금융계의 스티브 잡스'? 너무 듣기싫어… 너무 존경하기에

정태영 사장이 가장 싫어하는 말 중 하나가 '한국 금융계의 스티브 잡스'이다. 보수적인 금융계에서 오너 경영인이면서도 튀는 철학과 혁신 경영 그리고 쿨한 말투, 옷차림에 이르기까지 스티브 잡스와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실제 정 사장은 스티브 잡스를 아주 좋아한다. 그러나 "너무 존경하기 때문에 그와 비교되는 것이 싫다"고 한다. 1960년 서울 출생으로 서울대 불문과와 미국 MIT대 MBA를 나왔다. 2003년 현대카드·캐피탈 사장이 됐다. 종로학원 창업자 정경진씨의 아들이자,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의 둘째 사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