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 경제의 침체로 국제유가의 '황제' 자리에서 밀려났던 미 서부텍사스유(WTI)가 최근 가파른 가격 상승세를 보이며 황제 자리 탈환을 노리고 있다. 미 서부텍사스유의 약진 요인은 미국 경제의 강한 회복세와 그로 인한 석유 수요 증가이다. 반면 유럽 원유 시장의 가격지표인 북해산 브렌트유와 주요 수요 기반이 아시아지역인 중동산 두바이유의 가격은 유럽 및 중국 경제의 침체 탓에 힘을 못쓰고 있다. 결국 국제 원유시장의 가격 지표들도 존재 기반이 되는 지역경제와 성쇠를 같이 하는 셈이다.
지난 12일 현재 서부텍사스유 가격은 배럴당 106.03달러로 두바이유(배럴당 103.47달러)보다 2.56달러 높았다. 서부텍사스유 가격은 지난 2011년 1월부터 두바이유 가격보다 낮게 형성돼 왔는데, 이달 초 2년 6개월여 만에 두바이유 가격을 역전했고, 현재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는 북해산 브렌트유를 바짝 뒤쫓고 있다.
지난 2월 서부텍사스유 유가는 브렌트유 유가보다 배럴당 23달러나 낮았지만, 지난 12일에는 브렌트유가 배럴당 108.88달러를 기록해 서부텍사스유는 브렌트유보다 2.85달러 낮은 데 불과했다.
올 들어 세계경제가 지지부진하면서 전반적인 원자재 가격 약세 분위기를 보였음에도 미 서부텍사스유는 미국 경제 회복을 배경으로 급격한 상승세를 보여왔다. 올 들어 지난 12일까지 서부텍사스유는 14%나 올랐지만, 브렌트유와 두바이유는 각각 3.6%, 3.8% 하락했다.
◇미 서부텍사스유 부활은 미 경제 회복 덕분
미 서부텍사스유가 부활의 몸짓을 보이는 데는 미국 경제가 홀로 회복세를 보이는 영향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유럽은 작년에 이어 올해도 마이너스 성장을 할 것으로 보여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의 늪에 빠져 있다. 아시아의 대표적인 성장엔진인 중국은 연초 8%대의 성장을 할 것이란 예상과 달리 올해 7%대 성장을 할 것이란 전망이 늘어나고 있다. 이에 유럽과 아시아의 대표 원유인 브렌트와 두바이유가 약세를 보이고 있다.
반면 미국은 경기 회복 기대감이 높아지면서 휘발유 소비량도 늘어날 것이란 전망이 커지고 있다. 유경하 동부증권 연구원은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지난 5년간 미국 국민의 휘발유 소비량이 지속적으로 위축됐는데, 6월 자동차 판매 증가 등으로 5년 만에 휘발유 소비가 회복될 수 있는 전망이 부각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실제 미국의 원유 재고도 줄고 있어 수요가 늘고 있다는 관측을 뒷받침하고 있다. 지난 5월 24일 미국의 원유 재고는 3억9755만 배럴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지만, 지난 5일 현재 원유 재고는 3억7392만 배럴로 한 달여 만에 6%가 줄었다. 곽진희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서부텍사스유에 대한 투기 수요를 의미하는 비상업 수요가 사상 최대 수준으로 늘어나는 등 투기 세력까지 붙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미 서부텍사스유, 국제 유가 1위 탈환하나
글로벌 금융위기 전까지만 해도 국제 유가의 대표주자는 서부텍사스유였고, 3대 국제유가(서부텍사스유, 브렌트유, 두바이유) 중 가격이 가장 높았다. 1990년대에는 서부텍사스유 가격이 브렌트유에 비해 배럴당 1~2달러 높았고, 두바이유보다는 3~4달러 높았다. 그렇지만 글로벌 금융위기로 미국 경제가 큰 타격을 받으면서 2011년부터는 브렌트유와 두바이유에 유가 순위를 내주고 3위에 머물러 왔다. 이후 서부텍사스유 가격은 평균적으로 브렌트유보다 배럴당 9달러 낮고 두바이유보다는 6달러 낮은 수준이다.
경기 침체에 더해 미국에서 셰일원유(퇴적암의 일종인 셰일층에 매장된 원유) 개발 붐이 인 것도 서부텍사스유 가격을 낮춘 원인이 됐다. 공급이 늘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원유 생산량은 2009년 초만 해도 하루 500만 배럴 수준이었지만, 셰일원유 생산이 늘어나면서 최근엔 하루 700만 배럴 수준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미국 경제가 회복되면서 국제 유가 3대 지표의 세력 판도에 큰 변화가 생겼다. 국제금융센터는 장기적으로 3대 국제유가 중 서부텍사스유 가격이 가장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본다. 오정석 국제금융센터 연구원은 "최근 서부텍사스유의 상대적인 강세는 유종 간 가격의 정상화 과정으로 보인다"며 "이 추세가 지속되면 서부텍사스유가 국제 원유시장에서 선도적 지위를 회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반면 손재현 대우증권 연구원은 "미국의 원유 재고가 줄어들면 미국 내 원유 생산량이 늘어나게 되므로서부텍사스유가 브렌트유를 다시 역전하는 수준까지 유가의 강세 흐름이 지속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