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DB

#. 시중은행 성남지점장 A 씨(50)는 지난달 11일 정오 경기도 과천시 청계산에서 목매 숨진 채 발견됐다. 회사 회의를 마친 뒤 "점심은 따로 먹겠다"며 은행 문을 나선 지 한 시간만이었다. 유서는 없었다. A 씨는 지난 20년 동안 이 은행에서 일했다.  중학교에 다니는 두 아들을 둔 A 씨는 죽기 직전 아내에게 전화해 "그동안 고마웠다"는 말을 남겼다.

유가족은 자살 사유로 '실적 압박에 따른 스트레스'를 꼽았다. A 씨는 지난 1월 본사에서 성남지점으로 발령났고, 그 뒤로 밤잠을 설쳤다. 술 마시는 횟수도 늘었다. A 씨는 '지점에 나가기 힘들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A 씨 아내는 그런 남편이 안타까웠다. 자살한 날 아침 A 씨는 아내에게 '오늘 휴직계를 내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 시중은행 지점장 자살 급증

실적 압박 탓에 목숨을 끊는 시중은행 지점장이 부쩍 늘었다. 지난달 30일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과 금융업계에 따르면 지난 1년간 시중은행 14개 중 KB국민·스탠다드차타드(SC)·우리은행을 비롯한 총 4곳의 시중은행 지점장이 자살했다.

조 모(49) SC은행 성수동지점장이 지난해 6월 경기도 용인시 수지 소재 아파트 16층에서 투신자살했다. 조 지점장은 일부 기업고객이 이탈하면서 업무 스트레스를 받았고 결국 그 압박을 견디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이 시중은행 지점장 연쇄자살의 방아쇠가 됐다.

이 모(53) KB국민은행 철원지점장이 지난 1월 서울 노원구 상계동 자택 화장실 샤워부스에 목을 맸다. 이 지점장은 2012년 지점장 평가에서 낮은 점수를 받고 의정부 지역본부 업무추진역으로 발령났다. 업무 실적 악화에 따른 좌천 인사였다.

지난 5월에는 김 모(54) 우리은행 인천 연수동지점장이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대출 중도 상환액이 늘면서 실적이 나빠지자 김 지점장은 올해 초부터 우울증 치료를 받았다. 김 지점장은 2년 전 인천 청라지구 아파트 2채를 분양 받았으나 아파트 값이 폭락하면서 상심이 컸다고 한다.

우리은행의 정년은 58세다. 실적이 나쁜 지점장은 55세부터 임금피크제 대상이 된다. 우리은행의 한 지점장은 "50대 지점장이 1년에 두 차례 실시하는 경영평가에서 C나 D 등급을 두 번 맞으면 임금피크제 대상이 된다"고 말했다. 임금피크제 대상자는 연봉의 240%(1년차 70%, 2년차 60%, 3년차 40%, 4년차 40%, 5년차 30%)를 5년에 걸쳐 나눠 받는다. 5년 뒤 급여는 종전의 30%까지 줄어든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실직 은행원이 시중은행 통폐합 과정에서 자살한 적이 있다. 그 뒤로 1년 동안 이처럼 많은 시중은행 지점장이 자살하기는 올해가 처음이다. 지난 수년간 시중은행은 지점 확장 경쟁에 몰두했다. 지점이 부쩍 늘면서 같은 은행 내에서도 고객 유치 경쟁이 치열해졌다. 한 시중은행 지점장은 "지점장이 통제할 수 없는 변수가 많아졌다. 돌발 변수가 발생해 실적이 나빠지면 손도 못 쓰고 C 등급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그 스트레스는 겪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고 말했다.

◆ 은행지점장 "실적 나쁘면 인격도 없다"

노동계는 '경쟁위주 경영평가 방식이 지점장을 자살로 내몰고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은행의 한 지점장은 "날마다 수능시험 보는 듯하다. 실적이 나쁘면 인격도 없다. 전국 지점장 회의가 일 년에 2차례 있다. 영업본부 회의도 수시로 열린다. 실적이 나쁘면 발언권도 없다"고 털어놨다.

지점장은 스트레스를 얼마나 받는 것일까. 정용배 KB국민은행 노조 부위원장은 "은행 지점장 할 정도면 먹고 살 만한데 왜 자살을 하느냐고 하지만, 실적이 저조한 지점의 지점장이 받는 중압감은 상상을 초월한다"고 말했다. 정 부위원장은 "매일 전산에 실적에 따른 경영평가 등급이 조회되고, 연간 평가에서 실적을 채우지 못하면 지점장 자리를 내놔야 한다"고 설명했다.

*시중은행 사업보고서. 계약직, 생산직 제외


은행 점포 밀집 지역에서는 같은 은행끼리 고객을 뺏고 뺏기기도 한다. 삼성역 인근 시중은행의 한 지점장은 "기업 영업차 고객을 찾으면 지점장 동료를 만나기 일쑤다"며 "얼마 전 다른 은행 예금 100억원가량을 유치한 적이 있는데 해당 지역 지점장 동료가 본사에 불공정 영업이라고 투서를 보내더라"고 말했다.

씨티은행은 개인과 지점별 실적을 공개한다. 지점 내 창구 간 경쟁까지 부추긴다. 창구 옆 직원이 자리를 비운 사이 다른 직원이 고객을 가로채는 바람에 머리채 잡고 싸우는 일도 벌어졌다. 한때 상위 5순위가 하위 5순위를 개인 지도하는 '페어링' 제도를 운용하다가 지점장 한 명이 자살하는 바람에 없앤 적도 있다.

◆ 부실 대출 책임 지점장이 떠 안아

은행 업황이 지난해부터 급격히 나빠졌다. 금리 인하로 예대마진이 줄자 방카슈랑스(보험)나 펀드 등 수수료 영업 압박이 커지고 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기준금리 인하로 대출 갈아타기가 늘어나면서 전반적으로 은행 간 경쟁이 심해졌다. 이것이 다시 은행 내부 경쟁으로 이어지면서 지점별 실적 스트레스가 커지고 있다. 퇴직연금 실적을 내라고 하면 부족한 실적을 채우기 위해 사설 대출브로커에게 개인 돈으로 적게는 수백만원에서 많게는 수천만원을 주면서 채우는 지점장도 있다"고 귀띔했다.

대출 부실화도 지점장을 압박하는 요인이다. 올해 초부터 경기 침체 탓에 부실 대출이 부쩍 늘었다.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정부 정책에 부응해 대출을 늘린 것이 화근이었다. 오치화 금융산업노조 교육문화홍보부장은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기업 대출을 늘렸으나 지난해부터 경기 침체 탓에 기업 대출이 부실화하기 시작했다. 정부 정책에 부응해 승인한 대출이 경기 침체 탓에 부실화하는 것을 지점장이 떠안는 은행 영업구조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금융감독원

◆ 간부와 부하직원 사이에 낀 '지점장'

현직 지점장들은 상사와 부하 사이에 끼여 위아래 눈치보기에 급급하다고 하소연 한다. 시중은행 7년차 지점장은 "본부장과 부행장은 아침 저녁으로 실적 개선을 독려하고 직원에게 쓴 소리 한마디 하면 노조에 투서가 들어간다"고 털어놨다. 후선 부서로 밀려난 지점장은 일선 복귀를 꿈꾸며 업무강도를 극단적으로 높인다. 밤낮 구분하지 않고 일하지만 실적이 나아지지 않아 좌절하기 일쑤다.

임직원의 사망 원인을 규명하기도 쉽지 않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직원 사망이 지병인지 업무 탓인지 규명하기 어려워 보상도 여의치 않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은행은 사망 원인과 상관없이 직원 1만4525명의 월급여 1%을 갹출해 사망자 유가족에게 지급한다. 퇴직금까지 합치면 유가족은 한꺼번에 8억원 가량을 받는다. 하지만 이 제도가 자살을 부추길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빚에 시달리는 직원은 자기만 죽으면 가족이 빚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하고 자살을 택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 시중은행 대책 마련…日 우울증 '산재 인정'

시중은행들은 부랴부랴 직원들에 대한 심리치료 제도를 강화하고 있다. KB국민은행은 올해 상반기 후선 배치된 직원 500명을 상대로 심리치료 프로그램 '힐링캠프'을 실시했다. 신한은행은 2007년부터 임직원 상대로 건강주치의와 심리상담 치료를 제공하고 있다. IBK기업은행도 임직원에게 심리치료 서비스를 제공한다. 전북은행은 지난해 은행권 최초로 매월 1인당 5만원씩 지급하는 감정노동 수당을 신설했다.

일본 구마모토시 지방법원은 지난 3월 자살 은행원을 산업재해자로 인정했다. 일본 구마모토시 히고은행(肥後銀行)의 시스템 담당자가 지난해 10월 본점에서 투신했다. 유가족은 자살 원인으로 장시간 근무에 따른 우울증을 꼽고, 지난 6월23일 구마모토 지방법원에 손해배상 1억7000만엔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홍완엽 IBK기업은행 노조 위원장은 “서유럽 국가에서도 은행 임직원이 감정노동 문제를 호소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영국 은행금융노동조합(BIFU)은 창구에서 일하는 은행원이 우울증을 호소할 때 오후에 반차를 내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